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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광무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광무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5.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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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

 

후한은 시기적으로만 전한과 구분될 뿐 권력 구조와 각종 제도 등은 전한 시대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답습했다. 이는 곧 전한시대의 문제점들이 후한에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왕망(王莽) 같은 모리배(謀利輩)조차 개혁을 구상했을 정도라면 다시 복귀한 제국 정부가 당장 개혁에 착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과제는 제국을 재건하고 왕망 시대의 후유증을 치유한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 정권의 몫이었다. 전한을 멸망시킨 외척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새로운 관료 정치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한 무기는 역시 유학이었다. 후한 초기의 황제들이 유학을 적극 장려한 덕분에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겨나고 토론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당시 유학의 발달에 기폭제가 된 것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대립이었다. 지금의 문학과 옛 문학의 갈등은 사실 한 제국 초기부터 있었던 문제다.

 

일찍이 진시황(秦始皇)분서(焚書) 사건으로 유가의 경전과 주석서 들은 거의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 무제가 유학을 국학으로 공인하자 당장 그 문제가 시급해졌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장려하려는 학문의 교과서들이 없는 것이다. 마침 다행스런 점은 진()의 통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기억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유학 경전들의 내용을 재구성해 새로이 학문으로 정립했는데, 이것이 금문학이다. 그런데 아무리 국가적으로 서적들을 소각하고 폐기했다 해도 각 가정의 장롱 속에 고이 간직되어온 문헌들까지 일일이 찾아내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시황의 폭압이 지나고 유학이 공인되자 민간에서는 옛날의 경전과 주석서 들을 주섬주섬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것을 금문학과 대비시켜 고문학이라고 불렀다.

 

전한 시대에는 무제 시절에 집대성된 금문학이 주로 연구되었으므로 고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기간 동안 학설을 정비하고 체계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후한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학이 제2의 부흥기를 맞게 되자 고문학파는 금문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광무제 시대까지만 해도 고문학을 배척하고 금문학을 장려한 덕분에 금문학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사본이 원본을 따를 수는 없는 법, 점차 고문학의 학문적 성과가 금문학을 능가하게 되었다. 후한의 중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고문학이 확고한 우위를 점했으며, 옛것과 새것을 두루 연구하고 섭렵한 통유(通儒)들도 출현했다. 이렇게 학파 간의 대립과 토론이 활발해지면서 유학은 점점 깊이를 더해갔다.

 

이대로 별 탈 없이 진행되었더라면 자연스럽게 유학(儒學)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관료 집단이 형성되었을 터이다. 원래 유학은 치국과 평천하를 목표로 삼은 데서 보듯이 현실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학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한의 현실 정치는 그렇게 평온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유학 세력이 장차 국가를 운영할 힘을 축적하는 동안 현실의 정치 구도는 다시 부패하기 시작했다.

 

 

후한의 무제 중국 역대 왕조들의 역사는 건국 초기에 영명한 군주가 등장했다가 점차 무능한 군주가 들어서면서 부패하고 쇠퇴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신생국이나 다름없는 후한을 성장시킨 인물 역시 첫 황제인 광무제다. 그는 전한의 한 무제에 비견되는 역할을 했으나 인물됨은 전혀 달라 온유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호족 세력들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아우르고 통합하는 정책을 구사해 일종의 제휴 권력을 유지했다.

 

 

2세기 초반부터 나이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전한을 멸망시킨 바오밥 나무에 대한 경계심도 점차 엷어졌다. 외척 정치가 부활한 것이다. 나이 어린 황제는 섭정을 필요로 했고, 섭정은 자연히 외척이 도맡았다. 하지만 여기서 전한과는 다른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어릴 때 즉위한 황제는 나이가 들면서 친정(親政)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당시 발달한 유학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척의 힘을 물리치려면 황제의 개인적 세력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왕당파(王黨派)가 있어야 한다. 외척이 아니면서 외척만큼 의지할 수 있는 세력, 황제가 선택한 것은 바로 환관(宦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답일지언정 정답은 아니었다. 외척은 밀어낼 수 있었으나 환관이 그 자리를 꿰찼기 때문이다. 이 허점을 노리고 권좌에서 물러난 외척이 다시 환관을 밀어내고 권좌에 복귀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후한 말기에 들어서는 외척 정치와 환관 정치가 맞교대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환관 정치는 일찍이 춘추시대 제 환공(齊 桓公)의 시대에도 있었고, 진 제국의 환관 조고(趙高)도 승상의 지위까지 올라 전횡을 일삼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환관 정치의 시작은 후한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후한의 정치적 환경은 전한 시대와는 달랐다. 우선 유학 세력이 있었다. 유학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이미 비판적인 시각을 충분히 갖추고 현실 정치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외척ㆍ환관 정치의 부패상을 목격한 그들은 강력한 반정부 여론을 형성하고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이것을 청렴한 의견, 즉 청의(淸議)라고 부른다. 수도 뤄양만 해도 3만여 명의 유학자들이 있었던 데다 유학은 그 원리상 향촌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는 학문이었으니, 당시 유학 세력의 반발은 전국적인 양상을 띠었다. 당연히 환관들은 황제를 움직여 유학 세력을 탄압하고 나섰다. 그들은 두 차례에 걸쳐 유학자들을 유배시키거나 옥에 가두거나 심지어 사형시키는 혹독한 탄압 정책으로 맞섰다. 일단 이 대결은 환관 측의 승리로 끝났고, 유생들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패배는 아직 정치 세력화될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래서 정부 시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지식인 운동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들과 달리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수권(受權)’ 능력, 즉 군대를 갖춘 세력도 있었다. 바로 지방호족들이었다.

 

 

오늘날의 뤄양 후한의 수도인 뤄양의 오늘날 시가지 모습이다. 현재 개발 공사가 한창인데, 공사 현장에서 후한 시대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죽 쒸서 개 준 통일

촌놈이 세운 대제국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흉노 정벌의 도미노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외척과 환괸의 악순환

또 다시 분열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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