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를 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 낯선 사람 집에서 잠을 잔다는 것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노인회 회장님이 오실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 마을회관에서 잘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해는 완전히 저물고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온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니, 절망이 싹터오기 시작했다. 온갖 비극과 비관을 한 몸에 안은 양,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사람인 양, 그렇게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었다. 과연 잠을 잘 수는 있는 것일까? 이러다가 아예 노숙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거절과 승낙
7시 30분쯤 되었을까? 4시에 이곳 경천리에 도착했으니 벌써 3시간 30분째 이러고 있었다. 한 분이 내 앞을 지나가신다. 바로 옆이 슈퍼이니 무언가를 사러 오시는 것이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이 묻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며 왜 여기에 계속 앉아 있는지 말했다. 그건 낯선 사람에 대한 긴장을 풀어도 된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제로는 상황이 된다면 집으로 초대해주십사하는 마음에서 그리한 거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집으로 불러들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을 알기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고,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믿으며 그리한 것인데, 역시나였다. 안쓰럽게 생각해주시긴 했는데, 그냥 지나가셨기 때문이다.
그 후 두 번째 분도 쭈뼛쭈뼛 내 앞을 지나가신다. 그래서 역시나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아까부터 여기 계속 있던데 무엇 때문에 그러세요?”고 먼저 물어보시는 게 아닌가. 그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이기에, 물 만난 고기처럼 사정없이 사정을 얘기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덧붙여 묻지도 않은 여행의 목적지까지 단숨에 말했다. 그제야 그 분이 “우리집이라도 괜찮다면 가보겠어요?”라고 제안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어마어마한 제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신다는 사실이 긴가민가했다. 그때의 어리둥절함이란, 그리고 미처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란~
그 말을 듣는 순간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좋다고 말했다. 잠이나 잘 수 있으련지 막막하던 차에 일이 그렇게 한 순간에 풀리더라. 이게 정말 꿈이냐 생시냐? 밥을 먹었냐고 물어보셔서 안 먹었다고 대답을 하니, 슈퍼에서 라면을 산 후 따라오라고 하시더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비극을 다 안은 양 꿍해 있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역시 인생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그 우연 속에 몸을 맡기고 가야만 하는 거다.
낯선 존재를 가족처럼 자연스레 품어주다
집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홀로 사시는 분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낯선 사람을 집으로 데려갈 순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도착하니 사모님, 손녀, 조카 손녀, 친척 언니가 계시는 게 아닌가? 나도 그 순간 적잖이 당황했고, 그분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본 사람을 집으로 데려온 뜻밖의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니 잠시 적막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멋쩍게 사모님에게 나를 데리고 온 이유를 말씀하셨고 그제야 사모님도 좋은 일을 했다며 나를 반겨주셨다.
라면을 맛있게 끓여주시고 맥주도 주셔서 허겁지겁 먹었다. 거기에 토마토까지 간식으로 챙겨주시며 “맥주 한 캔 더 하실래요?”라고 물으시더라. 말로는 할 수도 없는 행복이 깃드는 순간이었고, 그토록 바라던 여행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밥을 다 먹고 나선 따뜻한 물로 씻고 빨래도 했다. 그러고 나선 사모님과 이야기를 좀 더 할 수 있었다. 국토종단을 떠나며 그저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었다. 그런 바람이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진 것이니, 더 이상 무얼 바라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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