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면에서 잠자리 구하기
저수지는 매우 넓었고 그 위에 집을 띄워 놓고 낚시질하는 강태공들이 많았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늦은 저녁까지 계속된 국토종단
이미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차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운행할 정도로 금세 어두워졌다. 밤 국토종단은 위험해서 되도록 자제해 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속력으로 걸었다. 익산 함열에 갈 때도 이와 같은 경우였기에 그 다음날 무진장 고생했던 안 좋은 기억이 생각나더라. 하지만 어쩌랴? 이렇게라도 서둘러 가지 않으면 도로 한복판에서 밤을 새야 한다. 거의 8시가 되었을 때 드디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십자가는 보이지 않더라. 그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최악의 기분이었다.
교회는 찾았으나 잠자리를 얻지 못하다
그런데 한 코너를 돌자 홀연 빨간 십자가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무 것도 없을까봐 걱정을 한가득 했던 터라 빨간 십자가만 봐도 영원의 안식을 얻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드넓은 요동벌판을 보고 한번 울어재낄 만 하다고 ‘울만한 곳에 대한 이야기(好哭場論)’를 펼쳤다지만 난 십자가를 보고 감격에 겨운 나머지 한바탕 울어젖히고 싶었다.
그때부터 힘껏 걸어 교회에 도착했다. 이젠 목사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로 허락해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더라. 교회가 꽤 커서 작은 방들이 있을 법한데도 잘 곳이 없다며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하신다. 이미 이와 유사한 경험을 꽤 많이 했기에 이런 상황에선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피차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때 목사님은 근처에 다른 교회가 있다며 소개해주시더라. 그러면서 “그 교회엔 방들이 많아서 자는 데엔 문제가 없을 거예요”라는 말씀을 덧붙여 주셨다.
어찌 되었든 이 작은 마을에 교회가 두 군데나 있다는 건 희망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하나 남은 희망이라도 부여잡고자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보니 파출소까지 있더라. ‘만약 그 교회까지 안 된다고 할 경우 저 파출소에 들어가 무작정 부탁해봐야겠다’는 방안까지 생각해뒀다. 한비야씨도 이와 같은 상황에선 경찰에게 얘기하여 숙직실에서 잔 경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수단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번 교회에선 꼭 허락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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