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고추를 심겠다고 제안하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온다는 건, 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겐 경악스런 일이다. 집이 비싸면 비싸질수록, 가전제품이 고급스러워지면 고급스러워질수록 그 공간은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보다 나만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즘엔 아파트의 브랜드명으로 계급을 나눠 “임대아파트 아이들과는 어울리지마”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편 나누기를 하고, 나의 집에 약속되지 않은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민폐를 끼치고 함께 엮이라
나 또한 그런 도시문화에 젖어 있었고, 여태껏 그렇게만 살아왔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들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호기롭게 ‘낯선 사람 집에서 잠도 자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며 국토종단을 떠난 것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있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세상이 삭막해서, 사람이 무서워서 문제였다기보다, 꽁꽁 맘의 문을 닫고 한껏 두려움을 키워온 내 자신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도시문화의 악습에서 벗어나는 일은 꽁꽁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 현장 속에 파묻혀 보는 일일 터다.
어제저녁에 이장님 댁에서 저녁을 먹는데 얼핏 ‘내일 고추를 심는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여독(旅毒)이 풀리지 않아 쉬고 싶다는 생각에 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다음 주 월요일까지 여주에 가야 한다고 계획해놨으니,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회관에 와서 몸을 누이며 생각해보니, 이건 둘도 없는 좋은 기회라는 거다. 농사일도 체험해보고 덩달아 마을 사람들도 사귈 수 있으니 말이다. 월요일에 친구와 보기로 했지만, 그런 약속 또한 국토종단의 일정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려고 하지 않아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하려고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책은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맘은 한결 가벼워졌다. 과연 이장님은 같이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실까?
그래서 아침을 먹다가 이장님에게 “오늘 일을 같이 해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나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지만, 이장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이다. 짧은 정적이 흘렀지만, 나에겐 꽤나 길게 느껴지던 순간이다. 그런데 이장님은 ‘뭐 대수냐’라는 듯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해주셨다. 어제저녁에 교회에서 받아주지 않아 경찰서를 찾아갔고, 그 덕으로 이장님을 소개받아 이곳에서 자게 됐으니, 참 인생이란 ‘한치 앞도 알 수 없다’는 표현이 적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야 나의 국토종단이 이처럼 짜임새를 갖춰가기 시작하는 것이니 말이다.
‘생거진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6시 30분에 눈을 떴고 바로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선 이미 왁자지껄 식구들이 아침을 먹고 있더라. 낯선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는데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보거나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나도 자연스럽게 앉아 맛있게 아침을 먹으면 될 뿐이다.
아참! 어제와 오늘 공통의 이야기 화제는 진천군 초평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아버지를 죽여 마당에 묻었는데 그게 3년여가 지난 지금에서야 들통 난 사건이다. 이장님네도 그 가족을 알고 지냈기에 남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막상 어제 뉴스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충격이 크셨을까?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도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며,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나누었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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