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에서 하루 더 머물 수 있게 되다
아침에 “오늘 일을 같이 해도 되나요?”라고 묻고 이장님의 승낙을 받았을 때만 해도, 고추를 심는 일이 하루종일 걸릴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장님네 식구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함께 와서 심다 보니 11시 정도에 끝나 버린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전개되니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오후 늦게까지 해야 자연스럽게 하루 더 머무를 수 있지만,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나면 점심만 먹고 여행길에 올라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점심은 아침에 간단하게 먹었듯이 집에 있는 반찬으로 먹을 줄 알았는데, 숯불로 삼겹살을 구워서 먹더라. 당연하지만 국토종단 중에 이런 식으로 배불리 먹기도 처음이고, 집에서 먹듯이 편하게 먹어보기도 처음이다. 그것도 이렇게 여럿이 삥 둘러앉아 먹으니, 삼겹살의 그 맛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더라. 역시 이래서 ‘밥은 함께 먹어야 맛있다’라고 하는가 보다. 어찌 보면 가족과 동의어로 쓰이는 ‘식구(食口)’라는 단어야말로 밥맛을 제대로 표현한 단어가 아닌가 싶다.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 밥을 함께 나누는 정과 그때 나누는 대화들이 일상을 풍요롭게 하니 말이다. 그런데 현실의 식구란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기보다 그저 한 집에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좀 씁쓸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마당에 숯을 피워 그 위에 불판을 깔고 고기를 구웠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먹고 있었고, 우린 학생부터 청년까지의 나이대 사람들이 모여 자리가 만들어져 있더라. 아무래도 숯은 화력조절을 할 수가 없으니 고기는 불판에 놓는 순간 금세 익어버리고, 제대로 뒤집지 않으면 타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고기를 굽는 동안엔 오로지 고기에만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노릇노릇 잘 익혀진 고기들은 접시에 차곡차곡 놓는데, 한창 왕성한 식욕을 뽐낼 때라 놓는 순간 고기는 사라지고 만다. 이건 게 눈 감추듯보다 훨씬 빠른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린 모두 다섯 근의 고기를 먹었다. 배는 빵빵하고 기분은 날아갈 듯 유쾌하기만 하다. 그러니 세상에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더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여기가 지상 낙원이다.
하루 더 머물 수 있게 되다
점심을 먹고 있으니 하늘은 어두워져 조금 있으면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이장님께 어떻게 말해야 하루를 더 머무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하더라. 고추도 다 심었겠다, 거기에 점심까지 푸짐하게 먹었으니, 하릴없이 하루 더 머문다고 하는 것은 얼핏 염치없는 행동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쭈뼛쭈뼛 서성이며 얘기할 타이밍을 노리던 그때 희소식이 들렸다. 오전에 도와준 이장님 친구네 밭에 고추를 심으러 가야한다는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면 갈 수 없는데, 지금은 오지 않으니 간다는 거였다. 그 말은 누군가에겐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소리로, 누군가에겐 세상 어떤 말보다도 달콤한 말로 들렸다. 이장님 두 아들들은 그 말에 한껏 인상을 썼지만, 난 절로 함박웃음을 터뜨렸으니 말이다. 이미 오전에 일을 해봤으니 크게 어려울 건 없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루 더 묵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기쁠쏘냐. 아~ 난 왜 이리 재수가 좋은 걸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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