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거진천에서 고추를 심다
이미 밭은 다 갈려 있었고 두둑엔 비닐이 씌워진 상태였다. 아마도 고추를 심기 위해선 그게 기초작업이었던 듯싶다.
체험 삶의 현장, 이장님네 고추 심기
고추심기는 ‘두둑에 적당 거리를 띄어서 구멍을 파고 물을 준다 → 모판에서 어린 고추싹을 떼어 물을 준 곳에 푹 박아 넣는다 → 흙을 퍼서 고추싹 근처에 뿌려준다 → 뿌린 흙으로 고추싹을 세워준다’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말뚝을 어떻게 쓰는 건지는 모르지만 각 고랑에 잘 옮겨 놓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니 막상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음에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더욱이 육체노동이니 겁부터 났던 것 같다.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은 모판에서 고추를 떼어 홈 파인 곳에 박아 넣는 일이었다. 예전엔 일일이 고랑을 파고 물을 준 후에 고추싹을 심어야 했을 테지만, 지금은 기구들이 좋아져서 구멍을 팔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구에서 아예 물까지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니 한 번 그 기구를 두둑에 찔렀다 빼면 구멍이 빠짐과 동시에 물까지 흠뻑 적셔지는 것이다. 참 멋진 발명품이다.
이장님네 가족뿐만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니 절로 신이 났고 일의 진행속도로 엄청 빨랐다. 어느 정도를 하다 보니 일이 손에 익어 자동으로 척척 손발이 맞더라. 단순 반복 노동이니 그렇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거나, 요령을 부려야 한다거나 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성실히 흐름에 따라서 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힘들어졌지만, 그만큼 오히려 정신은 맑아져 가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건 정직한 노동이기에, 그런 정서들이 안정감을 주는 것만 같았다.
고추심기와 정직한 땀방울
앞엔 저수지가 있고 주위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풍경은 흡사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오는 마을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더욱이 지금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고추를 심으며 사람들과 오순도순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으니, 그 영화에서 감자를 캐던 장면과 정확히 오버랩이 된다고나 할까. 그 장면을 봤을 때도 ‘몸은 힘들 테지만, 마음만은 편하겠네’라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도 산기운과 밭기운을 동시에 받으며 사람들의 행복한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일을 하고 있으니,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기만 하다. 땀을 흘린 후에 마시는 냉수는 여느 보약 부럽지 않은 생명수 같은 느낌까지 들고 말이다.
이장님은 고추 심는 일은 고추 따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고추는 뙤약볕이 작렬하는 한 여름의 기운을 온몸에 받으며 따야 한단다. 그러니 땀으로 맥질하게 되는 건 기본이고 한낮의 볕에 몸이 익을 지경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거기에 고추의 매운 성분은 그대로 눈ㆍ코ㆍ피부 할 것 없이 전해져서 아프게 한단다. 그것이야말로 어찌 보면 이런 일과는 완전히 다른 진정한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장님네 고추를 심는 일은 11시 정도가 되어서야 끝났다. 하루종일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난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이제 점심만 먹고 나는 다시 국토종단을 떠나야 하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더라. 어쨌든 점심을 먹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 난 경로당으로 돌아와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봐야만 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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