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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아리랑을 쓰게 된 작가의 말 - 5. 민족 공통의 역사를 반쪽만 가르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다 본문

연재/배움과 삶

아리랑을 쓰게 된 작가의 말 - 5. 민족 공통의 역사를 반쪽만 가르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다

건방진방랑자 2021. 2. 1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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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족 공통의 역사를 반쪽만 가르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다

 

 

통일적으로, 또 한 가지 우리가 분단이 되었는데 분단된 이후, 해방 이후의 역사만을 서로 대립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 못 갖게 하고 쪼금 관심 가지면 빨갱이로 몰아서 죽이고, 이런 식의 역사를 산 게 아니고, 현재의 입장 속에서 식민지 역사까지도 그런 식으로 반토막을 냈습니다. 그러니까 식민지에서 우리 민족이 투쟁한 것은 민족주의자만 투쟁한 게 아니고 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투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교과서에서 완전히 지워서 없애버렸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우리 민족주의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청산리 전투, 김좌진 장군의 그것만을 끝나버리고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어요. 이북도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을 다 지워버리고 사회주의들의 주장만을 썼는데 그것도 김일성 중심으로 써놨어요.

 

 

▲ 분단된 후엔 반공이데올로기가 모든 생각을 규제했다. 심지어 아이들이 보는 만화까지도.

 

 

 

전체를 보게 하려 의도된 소설

 

문제는 해방 이후의 공산주의와 일제시대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일본놈들이 이동녕 선생에 대한 기록을 남긴 걸 보면 사회주의자라고 해놓고 가로에다가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가로에 써놨습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1869217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이병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8(1896)때 독립협회에 가담하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투옥되어 7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이때 민권운동과 개항운동에 더욱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이후 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YMCA 운동을 전개하였고, 양기탁ㆍ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청년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하며, 이때부터 김구 선생과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후 1906년 만주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반 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며 조국 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313일 사천성 기강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 19489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분단되어 있는 것이 앞으로 몇 년 갈지는 모릅니다. 100년이라고 가정을 하십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5,000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또 5,000년을 간다고 하면 만년의 세월 속에서 100년이라고 하는 길이는 얼마겠습니까? 1일까요? 1일까요? 아니죠. 바늘 끝으로 하나 찍을까 말까하는 세월일 겁니다. 그 세월을 살면서 어떻게 민족의 공통의 역사를 자기현실 정권의 이익에 의해서 우리 민족 성원들이 다 보지 못하고 반 밖에 못 보게 하는 애꾸눈을 만들 수 있는 것인가?

 

 

▲ 민족 공통의 역사를 분단이 된 이후론 반쪽 역사만 가르치고 있다.

 

 

 

역사교사ㆍ교수 비판과 역사복원의 소명

 

이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을 작가가 쓰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해서 저는 아리랑에서 실종돼 버린 역사, 현실정치 세력들이 암장해버린 묻어 파묻어 버린 역사를 제대로 써야 되겠다하는 것이 아리랑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이 똑같은 사실 그대로를 기록을 해 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은 그 날부터 시작해서 해방이 된 그날까지 혁혁하게 싸운 우리 인류사 200년이 식민지 역삽니다. 그 식민지가 된 땅 중에서 유일하게 끊임없이 투쟁한 유일한 민족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겁니다. 이 사실은 우리보다는 일본이, 프랑스 학자들이 먼저 사실 규명을 해 논 바입니다. 이 땅의 역사학자가 역사를 팔아먹으면서 각 대학 강단에서, 고등학교 교단에서 역사를 팔아먹으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약 56만명을 헤아릴 겁니다.

그중에서 중ㆍ고등학교 선생들은 연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제외해놓고 놔서도 대학교수 2만 여명은 그러한 역사의 요구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한 일이 없이 시키는 데로만 가르친 겁니다. 반쪽만. 제가 아리랑에서 감히 그것을 시도해서 미력하나마 이루어냈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랑을 쓰면서 아리랑은 징게맹게 외배미뜰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시작돼서 수많은 곳으로 부채살처럼 퍼져나가는 형태의 이야깁니다. 저는 아리랑을 이렇게 시작해야 되겠다 막 지평선이 보이는 푸르른 들녁에 자기 힘이 아닌 딴 힘에 의해서 조국을 떠나 팔려가는 그 모습을 그리면서 저 바다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는, 그 먹구름이 왜놈이라는 세력의 상징이다. 이렇게 해서 장면을 다 머리속에 그려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해방이 과연 해방이냐? 아니죠. 여러분 다 알죠.. 해방이 곧 분단, 해방되는 그 날 우리는 바로 분단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 비극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방만세, 독립만세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 숙제를 안고 김제 취재를 끝내고 군산 취재를 끝내고 그 다음에 90년에 중국 취재를 떠나는 겁니다.

 

 

▲ 반공에 경도된 교사와 교수도 당연히 문제지만 지금도 일본의 입장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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