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리적 철학이 망각한 것들
이제 다시 장자의 언어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에게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언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삶의 연관을 떠나 메타적인 이론체계로 변할 때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장자는 이런 본래 기능을 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세계의 기원과 통일에 대한 거대담론이나 혹은 언어를 가지고 유희하는 혜시(惠施)를 언급하고 있다. 「제물론(齊物論)」 편을 보면 혜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세계(天地)는 나의 더불어 태어났고, 만물들과 나는 하나다[天地與我並生, 而萬物與我爲一].” 혜시에 따르면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계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늘은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 위에서 높고 파랗게 펼쳐져 있는 것이고, 땅도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 밑에서 우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나를 떠난 세계나 세계를 떠난 나는 단지 추상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삶의 지평에서 나는 세계와 불가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개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있는 컵도 나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결코 나와 무관한 컵이나 컵과 무관한 나는 사변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혜시는 이 세계와 이 세계 속의 개별자들과 나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장자는 이런 혜시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미 하나라고 여긴다면 우리에게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우리가 하나라고 말했다면, 우리에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와 ‘하나라고 말하기’는 둘이 되고, 또 그 둘과 하나는 셋이 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아무리 숙련되게 계산 잘 하는 사람도 그 끝을 잡을 수 없는데, 평범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 旣已謂之一矣, 且得無言乎? 一與言爲二, 二與一爲三. 自此以往, 巧曆不能得, 而况其凡乎!
장자에 따르면 세계의 통일성을 신봉하고 있는 혜시가 만약 세계의 통일성을 진정으로 확신한다면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어떤 언어적 주장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통일성 바깥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의 통일성을 언표하게 되면 세계는 통일되지 않았음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런 역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세계의 통일성이라는 사태와 그 사태를 지칭하는 언어적 표현을 다시 통일시키려는 다른 언설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사실 세계가 통일되었다는 말 자체도 이 세계 속에 속해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세계의 통일성은 고사하고 무한히 많은 언설들을 메타적으로 증식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분명세계의 통일성과 모순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장자에 따르면 세계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혜시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세계의 통일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히려 통일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통일성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혜시로 대표되는 합리적 철학의 옹호자들은 언어 자체의 작동 논리인 대대(待對) 관계를 무한히 증폭시켜서 거대담론을 형성했다. 그들은 합리적 철학의 거대담론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가 일상 언어의 쓰임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합리적 철학의 담론은 진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자 체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상 언어는 진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철학의 담론마저도 일상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이런 담론은 기본적으로 일상 언어로부터 추상화와 체계화를 거쳐서 탄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담론이 이런 추상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때, 합리적 철학은 유한한 삶이 조우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결국 망각하게 된다.
결국 장자가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은폐된다[言隱於榮華]”고 말할 때, 앞의 언어[言]가 일상적 삶 속에서 쓰이는 본래적 언어를 의미한다면, 뒤의 화려한 수사들[榮華]은 삶과 무관하게 구성된 거대담론이나 변론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영화(榮華)라는 말은 원래 나무를 화려하게 덮고 있는 무성한 꽃들과 잎들을 가리킨다. 이런 문학적 표현으로 장자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번성한 꽃과 잎들이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은폐시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언어도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은폐시킨다는 것이다. 아무리 울창한 잎들과 꽃들로 덮인 나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특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로부터 기원한 것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수사들도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명한 사실을 망각한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담론들은 모든 인간들의 다양한 삶의 세계를 자신들의 이론체계로 재단하려고 한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다툼이 생기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言惡乎隱而有是非]?”라는 질문의 대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