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것과 저것 아닌 것
이제 발제 원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어떤 것도 저것 아님이 없고, 어떤 것도 이것 아님이 없다[物无非彼, 物无非是].’ 원칙적으로 세계는 소[牛]인 것과 소 아닌 것이라는 대대 논리로 설명 가능하다. 젖소ㆍ황소ㆍ물소 등이 소인 것에 속한다면, 대통령ㆍ염소ㆍ원자폭탄ㆍ오사마 빈 라덴ㆍ미적분학 등은 모두 소 아닌 것에 속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소인 것과 소 아닌 것이라는 논리에만 해당될 수 있는가? 추상적으로 만일 우리가 개념 A를 사용하고 싶다면, 또 세계는 A인 것과 A 아닌 것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세게를 분할하는 핵심적인 논리가 대대 관계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아울러 이런 대대 관계에 의해 분할되어 우리에게 현상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의적이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장자는 대대 논리를 저것을 의미하는 피(彼)라는 개념과 이것을 의미하는 시(是)라는 개념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장자는 왜 언어를 분석하면서 많은 가능한 예들 중 하필이면 대명사에 해당하는 이것과 저것을 예로 삼고 있을까? 아마도 이것과 저것이라는 대명사처럼 마치 지시대상을 확실히 가지고 있어 보이는 것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지식인들의 옳고 그름[是非]의 논쟁에는 기본적으로 이쪽과 저쪽이라는 의식, 즉 이것과 저것이라는 기본적인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저것과 이것으로 장자는 피와 시를 사용하고 있는데, 관용적으로 ‘저것(혹은 저쪽)’과 ‘이것(혹은 이쪽)’을 나타내는 말은 피(彼)와 차(此)이기 때문이다. 장자가 관용적인 피차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피시라는 용어를 쓴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장자는 이쪽이라는 의식이 이미 옳음(혹은 이것이다)이라는 판단을 낳을 수 있는 계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결국 장자가 피시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런 언어의 대대 관계 속에는 고착된 자의식의 계기와 아울러 그런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 혹은 시비판단을 비판할 수 있는 계기도 전제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저것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이것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이것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저것이라는 말을 동시에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것 아님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그 역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장자에 따르면 어떤 개념 A를 이용한 단언은 -A가 아님을 단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호적으로 A ≠ (-A)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자에 따르면 결국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생기는[彼是方生]’ 것이다. 장자의 이런 생각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즉 장자의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도 또 하나의 옳음[是]을 주장하는 담론이 아닌가? 장자는 이런 식의 반론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말한 언어의 대대 관계에 대한 언명, 즉 ‘이것과 저것이라는 개념은 동시에 생긴다’라는 표현을 다시 한 번 뒤틀어 버린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개념이 동시에 생긴다’고 말할 때의 동시에 생긴다[方生]도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동시에 소멸한다[方死]는 의미를 대대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장자는 언어의 의미가 그 자체의 대대 논리를 전제로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자유롭게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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