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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Ⅵ. 꿈과 깨어남 - 2. 꿈 은유의 중요성, 판단중지의 한계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Ⅵ. 꿈과 깨어남 - 2. 꿈 은유의 중요성, 판단중지의 한계

건방진방랑자 2021. 7. 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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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판단중지의 한계

 

 

꿈 은유는 장자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더군다나 꿈 은유는 내편에만 나온다는 점에서 장자 본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꿈 은유가 가진 철학적 함축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 여자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건 나만의 꿈이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과거의 상태라면, 다른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는 현재의 상태다. 결국 우리가 그건 꿈이야라고 했을 때, 우리는 과거의 생각이 단지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우선 무엇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건 나만의 꿈이었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꿈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을 할 때 우리는 마치 꿈으로부터 깨어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녀가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꿈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는 옛날 판단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현재의 판단도 모두 꿈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결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또는 사랑하지 않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깨어남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깨어났다는 것은 단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꿈 은유로 말하려는 것이 결국 이런 회의주의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많은 학자들은, 특히 서양의 학자들은 꿈 은유를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로 독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장자의 꿈 은유가 전해주는 회의주의가 인식론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편견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론적 주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사태나 타인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장자는 꿈 은유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료적 회의주의라고 장자의 꿈 은유를 독해하는 견해는 어느 점에서는 옳지만 또 다른 점에서는 전적으로 장자를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 분명 장자가 자신의 생각을 독단적으로 묵수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치료적 회의주의라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장자는 깨어남을 일종의 새로운 꿈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꿈으로부터 깨어난 상태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치료적 회의주의는 장자가 옹호하고 있었던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 치료적 회의주의에 따르면 깨어났다고 하는 상태도 일종의 새로운 꿈이기 때문에, 깨어난 상태도 일종의 꿈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일체의 모든 판단들에 대해 판단중지(epoche)함으로써 마음의 평정(ataraxia)을 도모해야 한다. 앞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는 판단이나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판단도 모두 중지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판단중지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는가?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모를 때 우리는 마음의 불안을 경험하지 않는가? 나아가 우리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은지에 대해 철저하게 판단중지할 때, 진실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또는 사랑할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 둘 모두 결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판단중지할 때, 우리는 그녀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고독한 독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치료적 회의주의라는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자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오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한 유아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치료적 회의주의가 권고하는 마음의 평정은 타자와 소통하지 않으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언제든지 타자가 도래하기만 하면 부서질 성질의 것일 수밖에 없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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