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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Ⅶ. 단독자[獨]의 의미 - 1.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의식’, 생사의 관념조차 벗어나다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Ⅶ. 단독자[獨]의 의미 - 1.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의식’, 생사의 관념조차 벗어나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4.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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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사의 관념조차 벗어나다

 

 

우리가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먼저 배우는 것이 물에 뜨는 법이다. 수영 강사는 내게 물에 몸을 맡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물에 빠져 죽으려는 느낌으로 물에 몸을 맡겨라라고 내게 말한다. 그러나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끝내 나는 다시 물에 가라앉고 잔뜩 물을 먹고 말 뿐이다. 우리는 화가 나서 수영 강사에게 다음과 같이 따질 수도 있다. “당신이 이야기한 대로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도 제가 이렇게 물을 먹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에 대해 수영 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물에 빠져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물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설마 물에 빠져서 죽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물에 빠져서 죽지 않고 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살겠다는 생각과 아울러 죽겠다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죽겠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살겠다든가 아니면 죽겠다라는 의식에서 자명한 것처럼 전제되어 있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다. 이 점에서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수영을 자유자재로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갓난아이에게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갓난아이는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사태에 대해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이야기에서 수영을 귀신처럼 잘하게 된 사람은 바로 갓난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인칭적인 마음, 즉 허심(虛心)을 갖기 위한 최종적 관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生死]이라는 관문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생사라는 짝(=대대) 관념은 제물론(齊物論)편에서 해체되고 있는 피시(彼是)라는 대대 관념으로 포섭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사라는 관념은 실천적이고 실존적인 지평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생사라는 대대 관념은 가장 심층에서 우리의 고착된 자의식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자의식의 최종적 보루가 바로 나는 살아있다라든가 살아있는 나라는 규정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양파껍질과 같이 구조화되어 있는 고착된 자의식을 벗겨 나가면 제일 마지막 남는 껍질이 바로 생사라는 대대 관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장자에게는 이 생사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주체로 거듭나는 마지막 관문이 된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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