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장자의 단독자
발제 원문에 쓰이고 있는 견독(見獨)이라는 말에서 견(見)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본다는 의미로 주체가 잊음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주체 형태를 본다는 의미다(이 경우 견이라고 읽는다). 다른 하나는 드러난다는 의미로 주체가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다(이 경우는 현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견독(見獨)의 방법을 데카르트(R.Descartes)의 방법적 회의와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의심과 회의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본래적인 주체 형식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진리를 회의한다. 그 회의는 수학적 진리에까지 이를 정도로 투철한 것이었다. 방법적 회의의 끝에 남았던 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Cogito)’다. 결국 코기토란 바로 인간의 자의식의 동일성이자 또는 사유함 자체다.
見 | |
견 | 현 |
주체가 잊음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하게 되는 새로운 주체 형태를 본다 | 주체가 새로운 주체 형식으로 드러낸다 |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에서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데카르트는 생각과 존재가 근원적으로 일치하는 장소를 하늘 위 이데아로부터 나의 마음으로 옮겨 놓는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그것을 존재의 보편적 진리로서 이해하기보다는 나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것은 나에게서 제거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물론 이때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육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정신으로서의 나, 생각의 주체로서의 나다. 즉 그것은 코기토의 주체로서의 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의 나는 내가 나 자신을 반성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한에서 존재한다. 데카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내가 이것을 말할 때마다 또는 정신에 의하여 파악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다.’
장자의 단독자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장자의 단독자는 코기토를 해체해야만 드러나는[見]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따르면 진정한 인간의 마음은, 사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자기 구성의 역량에 관련된다. 사유 자체에 대한 장자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견독 뒤에 바로 ‘고금이라는 시간의 대대 관계를 해소했다[無古今]’라는 구절을 통해 장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과거[古]는 바로 내면 혹은 자아의식으로 기능하는 성심의 시간성을, 그리고 현재는 새로운 삶의 문맥을 짜면서 조우한 타자가 이 내면을 통해 왜곡되어 정립된 외면의 시간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의 세계 속에서 현재는 과거에 의해, 즉 외면은 내면에 의해 허구적으로 정립된다는 장자의 통찰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외 혹은 고금의 대대 관계와 허구적 정립 관계는 우리의 삶이 타자와 새로운 삶의 문맥을 짜 나아가는 긴장 속에서 출현하는 전도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내면과 외면이 이렇게 성심의 과거성에서 존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이 현재성을 띠는 것처럼 보이기에,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면도 현재성을 띤다는 착각과 전도가 일어나게 된다. 대대 관계의 한 사례로서 내외 관계는 우리 인식을 통해서 이렇게 정립된다. 그러나 인식을 통해 정립된 내면과 외면은 표면적으로는 인식하는 내면과 인식되는 외면으로 현실적 계기[今]인 듯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내면이 다름아닌 고착된 자의식이라면, 그리고 이 고착된 자의식이 과거[古]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식을 통해 정립된 내면과 외면 모두는 삶이 처한 현실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과거[古]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성심과 관련된 인식과 사유의 문제는 우리의 의식이 지니는 시간성의 계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기본적으로 시간성의 계기가 전제되어 있는 논의다.
사유와 반성은 기본적으로 대자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유와 반성이 즉자적이라면 코기토는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사유의 이런 대자성은 기본적으로 의식의 시간성을 전제해야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나를 반성하거나 무엇인가를 회의하는 코기토는 장자의 단독자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古今]라는 시간성의 계기로 존립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