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자의 도(道)
1. 지행합일의 한계와 극복법
중국 철학에서 중요한 철학적 주장들 중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주장이 있다. 말 그대로 ‘앎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진리가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진리란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행합일의 주장이,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는 진리관, 혹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지행합일의 실천과 앎 중에서 먼저 정립되는 것은 다름 아닌 앎이기 때문이다. 지행합일에서의 앎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위적 앎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당위란 지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런 당위적 앎이 없었다면 지행합일이라는 논의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게으른 어느 남자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해야만 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이 남자가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당위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당위적 생각을 실천에 옮겨서 현실에서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남자가 지행합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행합일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어떤 주체가 이러저러하게 살아가고 있다. 둘째, 그 주체가 자신의 삶을 비판하고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이상적 모습을 정립하고, 즉 자신이 실천해야만 할 이념을 정립한다. 셋째; 이 주체는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당위적 사고의 과정 |
무의식 → 인식 → 실행 |
문제는 이 둘째 단계에서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이상적 모습에 대한 당위적 앎의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이상적 모습이 만약 공동체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 즉 초자아가 원하는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다면 지행합일의 논의에서 진정한 주인은 공동체나 공동체의 규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주체는 단지 공동체의 규칙을 매개하는 매체에 불과하고, 지행합일이란 결국 공동체적 규칙이 모든 개체들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나와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인, 즉 타자와 조우하는 경우, 지행합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이 경우의 진정한 앎은 타자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 경우에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무의식적이든 혹은 의식적이든 타자와 관계하는 앎의 근거로 계속 고집한다면, 우리는 타자와 갈등하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더 심한 경우에는 우리는 타자에 대해 원치 않았던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지행합일의 논의에는 타자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단순한 지행합일의 논의는 유아론적이고 독백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지행합일의 논의는 반드시 타자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 지행합일의 논의여야 앎의 발생과 실천의 논리를 사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의 얇은 조우한 타자를 통해서 부단히 자기조정하면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했더니 저 사람이 인상을 썼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라는 식으로 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이렇게 발생한 앎을 실천하지만, 이런 앎이 자신이 조우한 타자와의 관계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미리 결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항상 새롭게 재조정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지행합일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주체는 타자와 조우할 수밖에 없다. 둘째, 조우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처신 방법을 정립한다. 셋째, 정립된 자신의 처신 방법으로 타자와 조우한다. 넷째, 소통이 실패했다면 다시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처신의 방법을 정립한다. 다섯째, 이렇게 새로 정립된 자신으로 타자와 다시 조우한다. 이렇게 타자를 고려한 지행합일의 논의는 무한히 그리고 완성의 예감 없이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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