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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Ⅷ. 수양과 삶의 통일 - 2. 위시(爲是)와 인시(因是),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Ⅷ. 수양과 삶의 통일 - 2. 위시(爲是)와 인시(因是),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

건방진방랑자 2021. 7. 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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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인시(因是)라는 판단형식은 표면적으로는 사태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비주체적인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또 역사적으로도 그렇게 오해된 것이 사실이다. 분명 인시라는 판단형식이 주체의 자유를 제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 인간은 유한자이고, 따라서 자유도 제약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절대적인 자유란 사실 무한자인 신에게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무한자라면 우리에게는 외부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어떤 타자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자유가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사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역으로 만일 우리가 자신이 외부를 가진 유한자라는 것, 다시 말해 타자와 조우할 수밖에 없는 유한자라는 것을 긍정하게 되면, 우리는 결코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자유란 조건적이며 제약적인 자유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보자. 바람이 없다면 행글라이더는 날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고 해서 행글라이더가 무조건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 사이에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법이다. 강한 바람이 불면 나뭇잎도 떨어지고, 지붕도 날라갈 수 있다. 그러나 행글라이더는 어떤가? 바람 속에서 유연하게 날아가는 행글라이더는 분명 만유인력과 바람의 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지 않는가? 강한 바람 속에서 행글라이더는 떨어질 수도 있고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신이 가야 될 방향으로 미묘하게 길을 잡아나가는 것 속에서 바로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주체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나고, 바람은 바람이야라는 판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은 하나가 아니다.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바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강하게 아래에서 솟구치는 바람과 조우할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좌측에서 휘몰아치는 바람과 조우할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위에서 비스듬히 내리부는 바람과 조우할 것이다. 이런 각각의 단독적인 바람의 흐름들은 상호간에 환원 불가능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솟구치는 바람에 맞게 자신을 조절했던 이 사람은, 바로 좌측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맞추기 위해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처럼 인시라는 판단 형식이 작동하는 주체는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주체 형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비인칭성이 주체가 나는 나라는 인칭적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동성은 자의식의 고착된 성격을 녹여서 타자의 흐름과 단독성에 입각해 자신의 자의식을 임시적으로 다시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의 역량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것이 아닌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해서 생긴 초자아를 자신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진정한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주체, 위시라는 판단을 수행하는 인칭적인 주체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야 한다. 만일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는 사람이 새로운 바람과 조우하기 이전에 ! 이 부분에는 이런 바람이 불었었지. 그렇다면 미리 이렇게 움직여야지라고 판단하고 몸을 움직인다면, 아마도 그는 곧 추락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능동성은 무조건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오직 수동적 조건에서의 능동성일 수 있을 뿐이다. 예기치 못한 타자의 흐름에 맞게 자신을 조절하는 능동성만이 진정으로 현실적인 능동성일 수 있다. 왜나하면 인간은 유한자, 정확히 말해서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을 확보하려는 유한한 무한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신(=무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사물(=유한자)도 아니다. 인간 실존의 신비는 바로 그가 신과 사물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자, 즉 유한하면서 동시에 무한한 존재라는 데 있다. 타자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타자는 인간 삶의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자가 우리의 삶에 도래할 때 우리는 자신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고, 또 그 타자와 소통하게 될 때 우리는 무한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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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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