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양론적 공간에서의 타자와 삶의 공간에서의 타자
정리하자면 ‘심재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 ㉮로 표시된 부분(심재에 대한 이야기)과 ㉯로 표시된 부분(날개 없이 날기[以无翼飛]에 대한 이야기)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자가 인칭적인 자의식의 제거를 통해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는 수양론을 다루는 부분이라면, 후자는 이렇게 수양을 통해 달성된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것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두 부분을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결코 단절시켜서도 안 된다. 만약 비인칭적인 마음의 회복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필연적으로 귀결된다면, ㉯부분은 사족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장자가 심재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심재 이야기의 이런 이원적 구조는 장자가 수양론적 공간(㉮)과 삶의 공간(㉯)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두 공간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구별의 관건은 이 두 공간에 함축되어 있는 타자의 성격에 달려 있다. 수양론적 공간에서는 아직 타자가 이념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삶의 공간에서의 타자는 단독적이고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수양론적 공간에서의 타자와 삶의 공간에서의 타자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전자의 타자는 타자 일반이라는 이념으로 정립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영역에 머물고 있지만, 후자의 타자는 단독적인 타자로서 삶에서 조우된다는 점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런 상이한 타자의 위상 때문에 수양론적 공간과 삶의 공간, 간단히 말해 수양과 삶이 구별될 수 있다. 수양론은 어떤 구체적인 타자도 부재한 상태에서, 즉 주체가 소통에 대한 이념을 가지고 정립하는 자기 해체의 공간이다. 거울 비유를 들면 수양을 통해 정립된 비인칭적인 마음은 자신 앞에 어떤 대상도 두지 않았기에 맑은 거울 자체로 있는 거울로 비유될 수 있다. 반면 구체적인 삶의 세계는 이런 순수한 주체의 비인칭적인 상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거울이 구체적인 세계에서 항상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는 여러 차례 비인칭적인 마음은 실질적 소통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강조한 바 있다. 분명히 실질적 소통을 이루는 사람은 비인칭적인 마음의 소지자, 즉 비인칭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실질적 소통이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비인칭적인 마음이 수양론적 공간에서 존립하는 반면 실질적 소통은 삶의 공간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이 양자 사이의 불연속성이 간과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수양과 삶 사이의 불연속성이 명확해져야, 장자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타자와 실질적으로 조우해서 소통하는 데, 즉 무매개적 소통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장자의 이런 문제의식을 무시하면, 우리는 많은 연구자들이 빠진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공간, 소통의 공간이 문제가 되지 않은 채 이루어진 중국 철학에서의 수양론이란 유아론적이고 나르시스적인 독백과 자기미화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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