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1. 장자 철학에서 숙고할 두 가지 사항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은 장자철학의 고유성을 규정한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가 일체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조우해서 소통해야 함을 의미한다. 장자에게 이런 무매개적인 소통은 존재론적으로 우리 마음의 본래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은 맑은 거울처럼 모든 타자를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소통 역량[神明]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울 비유는 확대 해석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랄 수 있는 유한과 무한의 통일성, 혹은 육체와 마음의 통일체 중 후자의 측면, 즉 무한한 마음의 측면만을 추상해서 설명하고 있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우리가 무한한 마음, 혹은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는 것은 단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필요조건만을 획득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세」 편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심재(心齋)를 통해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소통해야 한 타자의 타자성[不得已]이 남게 된다. 그가 권고한 것에 따르면, 우리는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하는 매개를 통해 규정된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로부터, 일체의 매개 없이 삶의 차원에서 직접적인 소통을 도모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로 이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꿈[夢]으로부터 깨어나서[覺] 타자와 소통하려는 목숨을 건 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장자가 바로 ‘날개 없이 날 수 있어야 한다[以无翼飛]’고, 혹은 ‘알지 못함으로써 알아야 한다[以无知知]’고 말했을 때 의도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숙고해야만 한다. 첫째 는 본래성과 은폐성의 도식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에 대한 것이다. 먼저 첫째 사항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본체[體]와 현상[用]이라는 도식이 아니라 본래성과 은폐성이라는 도식을 사용함으로써 장자는 수양론과 존재론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성은 수양론의 측면에서 보면 실현되어야 할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고, 존재론의 측면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규정하는 원리가 된다. 그런데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장자의 수양론적 도식은 오히려 타자와의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그 자신의 문제의식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도식은 마치 마음의 본래성을 회복하기만 하면 타자와의 모든 관계맺음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듯한 그릇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장자는 수양을 통해서 확보된 마음의 본래성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은연중에 시사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장자』내편」을 전체적으로 볼 때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수양론적인 이야기들에 비해, 이런 장자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이야기들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장자 본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장자』를 편찬했던 그의 후학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때문에 ‘수양이 완성되면 타자와의 소통은 저절로 귀결된다’는 식으로 장자를 독해하는 해석들, 즉 유심론적 해석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제 둘째 사항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장자는 모든 이념들을 부정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흔히 장자를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자유로웠던 대자유인으로 간주하지만, 이것은 철학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장자 독해로부터 나온 섣부른 평가일 뿐이다. 이런 이해에 따를 경우 장자철학의 무매개적 소통의 이념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장자는 모든 종류의 주체 형식, 즉 윤리적 주체, 사변적 주체 등을 비판하고 해체했다. 그렇지만 그런 해체의 목적은 소통 주체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모든 종류의 매개(나 이념)를 비판하고 해체했다. 그렇지만 그런 해체와 비판은 소통이라는 이념을 위해서였다. 사실 이념은 철학의 중핵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무엇’으로서의 이념은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존립 근거라는 것이다. 장자에게 무매개적 소통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이념이고, 단독자는 이런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완성된 주체다. 실천이나 수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체와 이념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이념이 없는 수양이나 실천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주체가 없는 수양이나 실천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념과 주체가 없는 철학은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공허하고 맹목적인 치기나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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