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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4. 위항인의 선명(정민교)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조선후기의 황량과 조선시의 자각 - 4. 위항인의 선명(정민교)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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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교(鄭敏僑, 1697 숙종23~1731 영조7, 季通, 寒泉)정래교(鄭來僑)의 막내 동생으로, 일찍이 사예(詞藝)로써 진사에 올랐으나 낙척자방(落拓自放)하다가 일찍 죽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형에 앞서 소대풍요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그 사람됨이 자못 소탕하고 구속되는 바가 없었으며, 술을 좋아하고 멀리 여행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이들 형제는 삼연(三淵)을 추숭하며 삼연(三淵)의 문하생과 어울려 함께 시작활동을 하는 한편, 홍세태(洪世泰)를 비롯한 여타의 위항시인들과 함께 백사(白社)를 결성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였다. 특히 정민교(鄭敏僑)는 여행을 즐겼기 때문에 기행시가 많은데, 오원(吳瑗)은 이에 대하여 여행의 뇌소(牢騷)를 읊은 것은 모두 정이 진실되고 시어가 새로우며 생각이 풍부하고 빼어났다[羈旅牢騷之所發, 皆情眞語新, 思致贍逸 寒泉遺稿序.]” 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정민교(鄭敏僑) 시의 또 한 부분은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수세작(收稅作)을 들어본다.

 

窮年兀兀夜膏焚 일년 내내 부지런히 밤새 불 밝히고
用力平生在典墳 평생 힘들여 책을 읽었네.
勤苦果成何事業 그러나 각고 끝에 무슨 일 이루었나?
經綸聊試此船村 쌓아온 경륜은 이 어촌에서 시험해 볼 뿐.
但能如法斯爲美 다만 법대로 하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길 뿐,
豈必干譽強作恩 어찌 명예를 구하여 성은(聖恩)을 억지로 바라리오?
到處要無箠楚虐 이르는 곳마다 학정이 없었으면
愛民吾受聖人言 백성을 사랑하라는 성인의 말씀 받았음이라.

 

수련(首聯)의 상구(上句)한유(韓愈)진학해(進學解)에서 焚膏油以繼晷; 恒兀兀以窮年의 뜻을 빌린 것이다. 서리(胥吏)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대부들의 고정관념으로 농상공(農工商) 등의 상민(常民)까지도 오류시(惡類視)하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 시는 자조적인 강개(慷慨) 이상으로 비정한 시속(時俗)을 나무라는 위항인의 양심까지도 함께 읽게 해준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이 쓰임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힐 때 위항인들은 자주 검()과 금()ㆍ주() 속으로 도피하기도 한다.

 

 

다음에 보이는 정민교(鄭敏僑)확귀(獲歸)에는, 시인이 스스로 농부로 등장하고 있어 경이로움 이상으로 감동을 준다.

 

九月寒霜至 南鴻稍稍飛 구월에 찬 서리 내리고 남녘으로 기러기 날아오기 시작하네.
我收水田稻 妻織木綿衣 나는 논에 나락을 걷고 아내는 목면 옷 짓네.
白酒須多釀 黃花自不稀 흰 술은 모름지기 많이 빚어야 하는 법, 국화는 스스로 많이도 피었네.
於焉聊可隱 且作百年歸 이 곳이야말로 이 몸 숨길 만 하니 백년 뒤에 돌아가리라. 寒泉遺稿1

 

형식이나 취재의 신기(新奇)를 구하지 아니하고 직접적인 생활 체험을 평담하게 얽어낸 진솔이야말로 위항시에서만 볼 수 있는 진기(珍奇) 그것이 아닐 수 없다. 도연명(陶淵明)백거이(白居易) 등이 과시한 전원시(田園詩)를 이으면서도 하천민(下賤民)의 생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권능(權能)은 오로지 위항인에게 속할 뿐임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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