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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왕국으로 가는 길(이인좌의 난, 탕평책)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1장 조선의 새로운 기운, 왕국으로 가는 길(이인좌의 난, 탕평책)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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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으로 가는 길

 

 

사대부(士大夫) 정치를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과두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과두정치의 장점은 어느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그 대표적인 사례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다(흔히 이 시기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공화정이라 부르지만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과는 크게 다르므로 과두정치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원래 원로원이 생겨나기 이전에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의 전제적 지배를 받고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말에 로마인들은 폭정을 일삼던 독재자 타르퀴니우스를 내쫓고 원로원을 성립시켜 최초의 고대 공화정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달한 고대 민주주의 정치의 영향이 컸다(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리는 그리스 식민시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이 그리스 문화를 이탈리아에 도입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다). 전제 정치의 혹독한 경험 때문에 이후 로마인들은 원로원만이 아니라 평민들까지도 왕정을 혐오하는 전통을 지니게 된다(종횡무진 서양사, 뿌리1장 참조).

 

그러나 과두정치에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 시대를 이끌 만한 뛰어난 리더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과두 체제에서는 탁월한 역량과 자질을 갖춘 정치가가 나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출현한다 해도 권력투쟁의 희생물이 되어 버릴 공산이 크다. 기원전 1세기에 황제가 되고자 했던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된 게 그런 예다.

 

개인의 권력 장악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과두정치에서는 권력자들이 파벌을 이루어 정권다툼을 벌이게 되기 쉽다. 로마의 과두정치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다툼이 그다지 극렬하지 않았던 이유는 원로원 이외에도 평민들의 회의기구인 민회(民會)가 강력한 제동장치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제동장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 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16세기 초의 중종반정 이후 200여 년 동안 사대부(士大夫) 정치가 판을 친 조선이다. 여기서는 파벌싸움이 극에 달하고 뛰어난 인재를 싹부터 밟아 버리는 과두정치의 근본적 결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당쟁이 망국에 이를 만큼 활발했는가 하면, 그동안 조광조(趙光祖), 유성룡, 정여립 등 개혁적 성향의 사대부들에서부터 광해군(光海君), 소현세자 등 왕족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정치 무대였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역량을 꽃피울 수 있었을 인재들이 한낱 말만의 모략과 책동으로 스러져갔다. 이런 과두정치의 결함에다가 시대착오적인 성리학 이념이 국가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조선은 국제 사회에서도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해간 것이다.

 

영조(英祖)가 그런 역사적 흐름을 얼마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왕세제 시절에 자신이 겪은 경험과 아울러 중종(中宗) 이래 200여 년간의 역사를 바탕으로 사대부(士大夫) 정치의 폐해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황폐하고 소모적인 정치문화에서 탈피하려면 조선은 이제라도 실질적인 왕국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영조는 조선을 왕국화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하긴, 애초에 조선은 왕국으로 출발했으니 정확히 말하면 왕정복고 프로젝트라고 해야 할까?

 

 

왕국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왕당파를 육성하는 길이다. 일찍이 세조(世祖)가 그랬듯이, 그리고 100년 전의 광해군(光海君)이 그랬듯이, 측근 세력을 키우면 국왕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조와 광해군이 결국 실패한 데서 보듯이 그것은 오히려 왕의 측근들이 훈구파를 형성해서 권세를 휘두르는 또 다른 폐해를 가져왔다(게다가 그 훈구파가 당쟁을 유발한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나마 세조는 임기 내내 카리스마를 유지했지만 광해군은 재위중에 사대부(士大夫)들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뭘까?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제3의 길은 뭘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되 각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런 점에서 탕평책은 오늘날 대통령 중심제에서의 양당 제도와 닮은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사실 탕평책의 기본 이념은 일찍이 선조 때 이이가 역설한 바 있다.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현상을 보고 이이는 양측을 치우치지 않게 대우하고 인사의 공평성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이미 숙종(肅宗) 때 영의정을 지낸 박세채(朴世采, 1631~95)와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탕평책(蕩平策)을 정식 정책으로 채택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했다(탕평이라는 말은 서경에서 인용되었다). 숙종 역시 그 건의를 받아들일 의도는 있었으나 끝내 실천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세채와 최석정이 모두 소론의 보스였으나 정작 탕평책을 시행한 것은 노론이 옹립한 영조(英祖)라는 점이다.

 

영조(英祖)의 치세에 서로 대립하는 두 당파는 노론과 소론이다. 이들 간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인사를 고르게 하면 된다. 예컨대 노론의 인물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좌의정은 소론의 인물로 임명하는 방식이다. 배분이 엇비슷하니까 양측은 불만이 있을 수 없으며, 만약 한 측이 앞서가는 분위기라면 다른 측이 제어할 수 있으므로 자연히 힘의 균형이 유지된다. 이것이 탕평책의 첫 번째 수단인 쌍거호대(雙擧互對, 둘을 등용해서 서로 견제하게 한다)의 전략이다. 마치 초등학교 교사가 어린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유치한 수단이지만, 영조는 아주 중요한 집권 초기에 그 전략의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된다. 그 덕분에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英祖)의 즉위에 가장 반대한 세력은 물론 소론이다. 특히 소론 중에서도 강경파는 박탈감이 더욱 심하다. 그들은 심지어 경종(景宗)이 병사한 게 아니라 노론 측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영조가 숙종(肅宗)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판에 영조가 김일경 일당을 축출하고 노론을 조정에 복귀시키자 그들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제는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사가 걸린 문제다. 사태를 위기로 판단한 소론의 이인좌(李麟佐, ?~1728)는 비밀리에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무리를 끌어모은다. 여기에는 정희량(鄭希亮, ?~1728), 박필현(朴弼顯, 1680~1728) 등 소론의 매파 인물들만이 아니라 예전에 노론에게 배척당했던 남인들도 대거 참여한다. 자신감을 얻은 이인좌는 중앙만이 아니라 전국 각 지방에서 현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점차 규합해간다.

 

이들은 일단 전국 각지에 경종(景宗)이 의문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대자보를 붙이며 선전전으로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 다음 단계는 물론 역모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과거와 같은 말만의 역모를 벗어난 수준이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짜 역모를 꾸민다. 양민과 노비는 물론 산적떼까지 동원해서 군사력을 준비한 것이다. 두 차례의 반정을 제외하면,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된 이래로 사대부 세력이 물리력까지 갖추고 진짜 반란을 획책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다(정여립의 사건이 있었으나 그 경우는 사실 여부가 확실치 않다).

 

 

 

 

자칫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치명타를 얻어맞을 뻔했던 영조(英祖)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탕평책(蕩平策) 덕분이었다. 1727년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전략에서 소론을 등용한 정책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맞아 떨어진 결과다. 이로 인해 유화 국면이 되면서 갑자기 동조자들이 적어지자 그동안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우후죽순처럼 뻗어가던 반란 세력의 기세는 일순간 크게 휘청거린다. 급기야 그들은 그늘에 있다는 장점마저도 잃어 버리게 된다. 소론의 한 보스였던 최규서(崔奎瑞, 1650~1735)라는 자가 마음을 돌려먹고 조정에 역모의 정보를 알린 것이다.

 

이제 이인좌 일당은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 되었다. 이래저래 역적으로 찍혔으니 그동안 준비했던 무력으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17283월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청주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반란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간의 선전전이 효과를 본 걸까? 청주를 장악한 그들이 경종(景宗)의 위패를 모시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자 영남과 호남에서도 그에 호응하는 반군이 들고 일어났다이탄은 바로 소현세자의 증손자다. 앞서 보았듯이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부모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으나 막내인 이회(李檜)만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소현세자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탄은, 영조의 치세에도 사은사로 명 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권에 반발하지 않았고 반군과도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탓에 반란이 진압된 뒤 처형을 당하고 만다. 증조부의 억울한 죽음이 집안의 내력이 되어 버린 걸까?.

 

만약 그들의 세력이 한데 합쳐졌다면 영조(英祖)의 정권은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정보를 얻은 덕분에 관군은 반군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고, 반군을 하나씩 차례로 토벌해서 결국 열흘 만에 진압에 성공했다. 영조(英祖)가 탕평책을 조금만 더 늦게 시행했다면 아마도 이인좌의 반란은 세번째의 성공한 쿠데타, 즉 반정이 되지 않았을까?

 

무사히 진압되었기에 그 사건은 오히려 영조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은 그것을 계기로 소론 강경파가 몰락한 탓에 혼란스러웠던 정국이 안정되었다는 게 크다. 소론이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소론 온건파는 면피를 위해 반란의 진압에 특히 앞장섰으나, 어쨌든 이 사태 이후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영조로서는 탕평책(蕩平策)이 과연 효과 만점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되었다는 데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노론이 우위를 차지하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세력의 균형이 유지된다.

 

그러나 영조(英祖)는 쌍거호대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관직을 두 세력 간에 고르게 배분함으로써 균형을 꾀하는 방법은 워낙 당쟁이 극심했기에 취했던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원래 인사의 요체란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하는 것이지 세력 안배에 따른 나눠먹기가 아니기 때문이다(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흔히 적용하는 지역 안배도 마찬가지다).

 

정국 운영에서 자신감을 얻은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바로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전략이다. 이것으로 탕평책은 당쟁의 치유책이라는 출발의 한계를 벗어나 적극적인 인재 등용제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영조의 눈에는 왕국으로 향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왕국으로서 가능한 각종 개혁 조치가 추진되는 것은 그때부터다.

 

 

분열 극복의 상징물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탕평책(蕩平策)이 효과를 거두자 영조는 두 번 다시 이 땅에 당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742년에 탕평비를 세웠다. 비문은 자신이 직접 썼는데, 탕평비를 세운 곳이 성균관이라는 사실은 그곳이 바로 당쟁의 온상임을 상징한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되살아난 당쟁의 불씨

왕국으로 가는 길

건국의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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