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묵(朴允默, 1771 영조47~1849 철종1, 자 士執, 호 存齋)은 정이조(鄭彛祚)의 문인으로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와 평신첨사(平薪僉使)를 지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정밀하여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우중배대학사석재윤공묘(雨中拜大學士碩齋尹公墓)」를 보기로 한다.
三十年間九度過 | 삼십년 사이에 아홉 번을 지나는데 |
法華山色尙嵯峨 | 법화산(法華山) 모습은 아직도 우뚝하다. |
松深古道靈風起 | 소나무 우거진 옛 길엔 시원한 바람 불고 |
花落荒原暮雨多 | 꽃 떨어진 거친 들엔 저녁비 내린다. |
楸舍簡編猶剩馥 | 개암나무 집 책에는 남은 향기 가득하고 |
梣灘樵牧亦悲歌 | 침탄에 초동은 슬픈 노래 부른다. |
忽聞蜀魄啼無盡 | 갑자기 저렇게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 들리니 |
可柰枝頭怨血何 | 나무가지 위에 뿌린 피는 어찌 하겠는가. |
박윤묵(朴允默)은 그의 『존재집(存齋集)』에 많은 시작(詩作)을 남기고 있어 조수삼(趙秀三)과 함께 위항인(委巷人)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시편(詩篇)을 남긴 시인이 되기도 하였거니와, 이 작품과 같이 쉽게 그리고 당인(唐人)의 여유를 누닐 수 있는 것도 그의 다작(多作)과 무관하지 않다. 시사(詩社)에서 위항인들은 시를 짓고 술을 마는 것으로 즐길거리를 삼았지만 이들의 시업(詩業)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그러한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과시한 작품으로 다음과 같은 「시후유작(詩後有作)」을 들 수 있다.
豪唫雖未售今世 | 호탕한 읊조림 금세에 팔지 못해도 |
苦癖何曾讓古人 | 시(詩)만은 어찌 고인에 사양하겠는가? |
簸弄江山空自好 | 강산(江山)을 음롱(吟弄)하니 공연히 그냥 좋고 |
招呼風月爲誰新 | 풍월을 부르는 것 누구를 위해 새롭게 했던가? |
搜膓鏤肺應添瘦 | 애태우며 짜내는 시 파리해지기 마련이지만 |
累牘聯篇不捄貧 | 겹겹이 쌓인 시편이 가난 구제 못하네. |
六十年來詩萬首 | 육십년 동안 지은 시 만수나 되니 |
放翁去後又吾身 | 육방옹(陸放翁) 이후에 또 이 몸이 있다네. 『存齋集』 卷22 |
육유(陸游)의 시작(詩作)이 평담(平淡)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거니와 물경(物景)이 많기로도 이름이 높다. 박윤묵(朴允默) 역시 이 작품에서 자신의 시세계를 방옹(放翁)에게 비기어 스스로 그의 다작(多作)을 자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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