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래교(鄭來僑, 1681 숙종7~1757 영조33, 자 潤卿, 호 浣巖)는 그의 아우 정민교(鄭敏僑)와 더불어 시문에 뛰어나 당대 사대부들의 추중을 받았던 위항인이다. 1705년 역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곳에서 시명(詩名)을 날리기도 하였다. 사대부 문인(文人)으로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을 따랐으며, 위항인(委巷人)으로는 홍세태(洪世泰)를 좇아 교유하였다.
정래교(鄭來僑)의 시를 두고 이천보(李天輔)는 “그의 시는 소탕연양(疏湯演瀁)하여 시인의 태도를 얻었는데, 가끔 성조(聲調)가 강개(慷慨)하여 연조(燕趙)의 격축지사(擊筑之士)가 위 아래로 치고받는 것과 같은 점이 있다. 대개 그 연원은 홍세태(洪世泰)에게서 나온 것이니, 천기(天機)로부터 얻음이 또한 많다[其爲詩也疏湯演瀁, 得詩人之態度, 而往往聲調慷慨, 有若與燕趙擊筑之士, 上下而馳逐. 蓋其淵源所自出於道長, 而其得之天機者多 「浣巖稿序」].” 하였다.
이는 사대부들이 온유돈후(溫柔敦厚)를 내세워 성정(性情)의 순화(醇化)를 중시하여 시에서 비애(悲哀) 및 격정(激情)을 배제한 것과 달리, 정래교(鄭來僑)는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감정을 호방하게 표출하였음을 두고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래교(鄭來僑) 시의 모습은 다음의 「동양서재(東陽書齋)」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垂老吾多病 胡爲滯海西 | 늙어가며 내 몸에 병이 많은데 어찌하여 해서(海西)에만 머무르겠나. |
開門千樹色 高枕一鸎啼 | 문을 여니 온갖 나무 빛 베개를 베니 꾀꼬리 소리. |
酒榼空仍卧 書籤散不齊 | 술통 비어 속절없이 누워 있으니 서첨(書籤)은 흐트러져 고르지 않네. |
羈愁兼別恨 故故暮雲低 | 나그네 수심과 이별의 한 때문에 자주 저녁 구름에 고개 숙인다. |
보이는 물상(物象)마다 시인의 고단한 심회를 포개어 보지만, 이제는 몸이 늙어 그 강개로움조차 사그러들고 비애만이 남은 시인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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