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람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나’를 오해한다
한편, 어린 시절 융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사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융이 특히 괴로워했던 사건은 자신이 오랜만에 공들여 쓴 작문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선생님이 도저히 자신이 쓴 것이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주 잘 썼기 때문에 나는 융의 작문에 최고 점수를 주어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해라!” 융은 자신이 쓴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믿어주지 않았다. “네가 이것을 어디서 베꼈는지 내가 알게 된다면 너는 학교에서 쫓겨날 거야!” 이 일로 인해 융은 깊은 상처를 받고 선생님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게 된다. 하지만 존 내쉬와는 달리 사람들의 눈에 띄기를 원치 않았던 융은 자기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는 이 일뿐 아니라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오히려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 아,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이구나.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에 부딪히면 분노하고 흥분하면서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믿고 싶어 하는 존재구나. 그는 이때부터 제1의 인격(일상의 인격)과 제2의 인격(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세계)을 분리하여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제1의 인격이 ‘인간의 유한성과 세속’에 발 딛고 있다면 제2의 인격은 ‘우주의 무한성과 존재의 신비’에 발 딛고 있었다. 그는 ‘제1의 인격’만으로는 친구를 가지기 어려웠지만 ‘제2의 인격’을 위한 친구로서 ‘죽은 사상가’들을 초대했다.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열여섯 살에서 열아홉 살 사이,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샘솟는 영감이 철학자들의 생각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독교적 스콜라철학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성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주지주의는 나에게 사막보다 더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 나에게는 그들이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문으로는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그를 대했다. 그는 마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그는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창조의 섭리나 피조물의 조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류 역사의 고통스러운 과정과 자연의 잔인성에는 일종의 결함, 즉 세계를 창조하려는 창조 의지의 맹목성이 그 밑바닥에 깔렸다고 솔직하게 토로했다.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132~134쪽.
융은 자신의 고통에서 시작된 복수의 방향타를 돌려 어느새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포석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물고기, 옴에 걸린 여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새, 개미에 둘러싸여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지렁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곤충들처럼 인간 또한 그렇게 서로의 불완전함에 의지하고 영향 받으며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꺼리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에 관해 조용히 발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학교 과목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칸트나 쇼펜하우어, 고생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는 엄청난 ‘잘난 척’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가 영혼의 친구를 찾으려 발버둥칠수록 그는 더욱더 오해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평범해 보이려 애를 써도 어디서나 튈 수밖에 없었던 융은 자신의 고민을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서글픈 결론에 이른다. 그는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을 끊임없이 통합하려 하지만, 제1의 인격에서 좌절당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제2의 인격으로 침잠해가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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