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융의 아곤: 천재들은 ‘좋은 전쟁’ 속에서 태어난다
한편, 칼 융에게 있어 ‘아곤의 공동체’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 아들러, 니체와 융. 이 네 명의 천재들은 서로에게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멀리서도 서로의 아이디어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해독하고 경쟁하며 독려하는 최고의 친구들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일부 교수들의 경고장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융이 발표한 논문이 동료들의 조롱을 받았을 때, 프로이트만은 그 논문의 가치를 알아보고 융을 초대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오후 1시에 만나 장장 열세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융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만난 것이다. 융이 가장 동경하는 대상이면서 그가 가장 처절하게 극복해야 했던 존재, 그가 바로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당시의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프로이트에 견줄 수 없었다. 그의 태도에는 진부함이 전혀 없었다. 내가 보니 그는 무척 총명하고 예리하며 어느 면에서나 괄목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모호한, 알 수 없는 구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느낌이긴 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79쪽.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대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 그러나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위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 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310쪽.
융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19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처음 만났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당시에는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저 멀리 제쳐두었다고. 스물다섯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검증하기에는 자신의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그는 단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검증할 수 있는 이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1903년 그는 다시 한 번 『꿈의 해석』에 도전한다. 그제야 그 책이 자신의 생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발견한다.
3년 동안 이미 그는 프로이트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차원까지 비상하고 있었다. 그는 환자가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되는 단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 시간이 무척 길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그러한 연상 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때마다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이런 상황에 적극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압의 원인’에 있어 20대의 융과 50대 후반의 프로이트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치료 과정에서는 신경증의 많은 사례에서 성욕의 문제는 다만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요인들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응, 비극적인 삶의 정황으로 인한 억압, 체면 차리기 등의 문제들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러한 사례들을 프로이트에게 제시했으나, 그는 성욕 외의 다른 요인들은 원인으로 여기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나로서는 자못 불만스러웠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76~7쪽.
‘성(性)’에 대한 시각 차이 이전에 프로이트와 융의 우정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었다. 융이 프로이트 이론에 한창 매력을 느낄 무렵 융은 대학에서 승진하기 위한 논문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프로이트는 학자들의 세계에서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프로이트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학문적 명성을 얻는 데 확실히 불리한 일이었다. 학술회의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복도’에서만 낮은 목소리로 거론될 뿐 전체 회의에서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융의 실험은 프로이트의 이론과 분명히 일치하고 있었다. 융은 자신에게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내 실험 결과를 발표하면서 꼭 프로이트의 언급을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튼’ 나는 프로이트를 알기 훨씬 전부터 나만의 실험을 해왔는걸. 그런데 그 순간, 융은 ‘제2의 인격’의 목소리를 듣는다. 네가 그렇게 프로이트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행세한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인생이라는 건축물을 거짓 지반 위에 세울 수는 없다. 그때부터 융은 공공연히 프로이트 편에 서서 그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진정한 갈등은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서 일어났다. 프로이트와 융은 열띤 토론을 나누며 열정적으로 ‘아곤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성욕’이라는 문제 앞에만 서면 융은 프로이트의 허둥대는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성에 관해 말할 때 프로이트의 어조는 갑자기 빨라지고 초조해지며 평상시의 신중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잃어버렸다. 융과 프로이트의 우정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게 한 충격적인 발언은 프로이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친애하는 융, 성 이론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는 성 이론을 가지고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보루(堡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는 열정에 넘쳐서 말했는데,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81쪽.
융은 ‘보루’나 ‘교리’ 같은 단어에서 프로이트의 격렬한 불안을 읽어낸다. 교리란 ‘토론’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 인간의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갖가지 의심을 단번에 짓밟아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격렬한 토론과 의심과 비판과 질문으로 우정을 쌓아올리고 있었던 두 사람의 ‘아곤(agon)’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었다. ‘성 이론’이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고자 한 권력의 충동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교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융에게 있어 충격적인 일탈이었다. 프로이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에 ‘성적 리비도(libido)’가 또 하나의 ‘숨은 신’으로 대체된 느낌이었다. 그 후 프로이트는 자신의 후계자를 융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걸출한 제자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위대한 아버지로 등극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못했다. 한편, 융은 자신이 그 위대한 후계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면서 자신의 지적 독립성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융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거역해야 한다는 고통과 싸우면서 아직 자신이 프로이트에 대항할 만한 이론적 근거를 갖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융은 친구이자 선배이자 아버지였던 프로이트와 갈등하고 그를 넘어섬으로써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나가기 시작한다.
프로이트와 요제프 브로이어는 신경증의 증상들 ― 히스테리, 통증의 어떤 유형들, 비정상적 행동 ― 이 사실상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런 증상들은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정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어떤 환자는 침을 삼키려고 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킬 수도 있다. 환자는 “그 상황을 삼킬 수 없는” 것이다. 비슷한 심리적 스트레스의 상태에서 두 번째 환자는 천식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는 “공기를 편하게 숨 쉴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환자는 특이한 다리 마비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는 걸을 수 없다, 즉 “그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이다. 네 번째 환자는 먹을 때 토한다. 어떤 불쾌한 사실을 “소화할 수 없는” 것이다.
-칼 융, 정영목 역, 『사람과 상징』, 까치, 1997, 23쪽.
우리가 친밀하고 소중했던 누군가와 헤어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사실 여기서 비롯된다. 상대방의 어떤 결정적인 부분을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상대방이 건드렸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이 거대한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우리는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를 삼키지 못하고, 그 차이를 천천히 소화시켜 관계의 새로운 차원으로까지 비약하지 못하고, 힘겹게 그 관계를 끝내버리고 만다. 프로이트는 융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마 융과 프로이트가 이런 부분에서 서로를 ‘삼킬 수’ 있었다면, 인류는 정신분석의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리는 역사의 진풍경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 ‘잘난 척’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 때문에 아무와도 진정한 친구가 되기 어려웠던 융. 그는 아무런 임상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온 힘을 다해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친구 아닌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융은 그들의 상처와 환각과 고통을 통해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무의식을 천천히 발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환자들과 함께 20세기의 새로운 아곤을, 칼 구스타프 융이 주최하는 아름다운 ‘아테네 학당’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젊은 시절 존 내쉬는 자신이 늘 친구들에게 배우고 있음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견디고 있는 외로움보다 훨씬 더 격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융은 자신이 늘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좀더 일찍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존재로부터 가르침을 얻었다. 그에게 프로이트 못지않게 소중한 스승은 바로 그의 ‘기이한’ 환자들이었다.
한번은 (……) 고용인들의 뺨을 때리는 습관이 있는 명문 귀족 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강박신경증에 걸려 어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습관대로 수석 의사의 뺨을 갈겼다. 그녀의 눈에는 수석 의사도 단지 조금 나은 하인 정도로 보였다. (……) 의사가 좀 당황한 가운데 그녀를 나에게 보냈다. 그녀는 키가 약 180센티미터나 되는 아주 위풍당당한 인물로, 정말이지 누구를 때릴 만도 했다! 그녀가 드디어 나타났고 우리는 무척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그녀에게 좀 불쾌한 내용을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녀가 격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때리려고 위협했다.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은 귀부인입니다. 당신이 먼저 때리십시오. 레이디 퍼스트 아닙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내가 당신을 때릴 겁니다.” 나는 정말 그대로 할 참이었다. 그녀는 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탄식하듯 말했다. “여태껏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 순간부터 치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환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남성적인 반응이었다. (……) 그녀는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제약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박신경증에 걸린 것이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26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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