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융의 독백: 신경증 덕에 배웠다
우리가 만날 또 한 명의 천재 칼 구스타프 융은 학교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우리는 저마다 학창시절 학교에 가기 싫거나 숙제나 시험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각종 ‘꾀병’을 생각해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칼 융은 학교를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다. 학교로 가야 할 때가 되면 난데없이 기절하거나 발작을 일으키곤 해서 학교를 반년 이상이나 쉬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이 소년 융에게는 행복한 고립의 자유를 선물해주었다. 방랑, 독서, 수집, 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만끽했던 어린 소년 융. 어떤 의사는 융이 간질병에 걸렸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융은 의사의 진단에 코웃음을 치며 달콤한 몽상에 빠져 지내고 있었던 어느 날. 소년 융은 손님과 아버지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손님이 아버지에게 아들의 안부를 묻자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의사들도 이제 우리 아이의 발작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우리 애가 만일 불치병에 걸렸다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고. 이제 얼마 안 되는 재산조차 다 써버렸는데, 만일 융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고. 어린 융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자기만의 몽상에 만족하며 살아가려 했던 소년 융이 엄혹한 ‘현실’의 벽 앞에서 느낀 첫 번째 충격이었다. 어린 융은 생각했다. 아, 그래,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했다니, 아버지께 폐를 끼칠 수는 없어, 그렇다면 공부를 해서 자립할 수밖에 없구나. 걸핏하면 졸도하거나 발작을 일으키던 소년 융은 이제 자신의 발작 증세와 맨몸으로 부딪히기 시작한다. 의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의지’만으로 발작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 라틴어 문법책을 가지고 와서 집중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 나는 기절 발작을 일으켰다.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으나 몇 분이 지나자 상태가 다시 좋아져 공부를 계속했다. “빌어먹을, 졸도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 그렇게 10분이 지나서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이것도 첫 번째 발작과 마찬가지로 지나갔다. “자, 이제 정말로 너는 공부해야만 해!” 나는 꾹 참아냈다. 한 시간 후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발작을 이겨냈다고 느낄 때까지 한 시간을 더 공부했다.
갑자기 나는 이전 몇 달의 상태보다 나아진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발작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몇 주 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66-67쪽.
공부도 싫고 학교에 가기도 싫었던 소년 융은 ‘발작을 해봐, 졸도를 해봐, 그럼 공부 따윈 안 해도 되잖아!’라는 명령을 내린 미지의 목소리가 바로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스스로의 무의식이 바로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무의식을 육체 밖으로 끌어내어 의식화하는 방법을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아직 정신질환의 각종 치료법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융은 아직 소년이었고, 아직 정신과 의사가 되기 훨씬 전이었으며, 소년 융은 그 고통스러운 신경증의 경험으로부터 소중한 무언가를 배웠다는 사실이다. 신경증은 소년 융의 부끄러운 비밀이자 숨기고 싶은 패배였다. 그러나 융은 신경증 덕분에 자신이 ‘겉으로 보이는 성실성’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성실성’을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융은 무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선사하는 황홀감에 빠져들고 싶었다. 융 또한 존 내쉬처럼 마음을 나누는 지속적인 친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융은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 끊임없이 고독을 추구하도록 충동질하고,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대화하라고 부추기는, 세상 만물로부터 무언가 신비로운 우주의 메시지를 읽어내라고 충동질하는 ‘제2의 인격’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다. 이토록 결연한 고립, 이토록 달콤한 고독만이 세계와 주체의 투명한 만남을 가능케 했던 것일까. 그는 신경증과 발작을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함으로써 학교에 다니면서도 내면의 탐구를 계속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다. 융은 부모의 걱정을 무마시키고 자신의 미래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자기의 무의식 속에 ‘비밀의 방’을 설계하고 시공하고 관리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또는 친구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럴 때 기억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생각은 무의식이 된 것이다. (……) 그러나 어떤 것이 우리의 의식에서 빠져나갔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마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차가 증발해버린 것이 아니듯이. 이 차는 그냥 시야에서만 사라진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그 차를 다시 볼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잊었던 생각과 순간적으로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칼 구스타프 융, 정영목 역, 『사람과 상징』, 까치, 1995,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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