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이 있다
나는 ‘침묵의 탑’에 버려져 썩어가는데,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한 독수리들이 나의 내장을 파먹는 듯하다.
-존 내쉬, 1967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곤 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로부터 오해받는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그런 일이 오랫동안 매일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아무리 건강한 영혼을 지닌 자라도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천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의 오해는 거의 상습적으로 일어날 때가 많다. 존 내쉬의 경우 사람들의 오해는 더욱 지속적이고 파괴적으로 진행되었다. 존 내쉬 스스로가 그 오해를 가속화한 측면도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상습적으로 무시하곤 했으며 누군가 질문을 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너 정말 그것도 몰라?’라는 식으로 반응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노년의 존 내쉬는 그토록 오만방자했던 젊은 시절을 후회하기도 했다. 자신의 천재성은 그런 오만함을 덮어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천재의 재능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오만쯤은 슬쩍 눈감아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교성이 뛰어났던 여동생 마사조차도 ‘오빠와 놀기’를 극도로 꺼려한 것을 보면 존을 ‘오해의 청정구역’에 격리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오해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스스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재 스스로 세계의 작동 원리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체험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존 내쉬에게 있어 이러한 원형적인 공포의 체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신분열 증세가 ‘냉전 시대의 사회적 희생물’이기도 했다는 점은 어린 시절 겪었던 전쟁의 공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유년기부터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으며 청년 시절에도 징병을 피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 흔적이 보인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 해군기지를 공격했을 때 조니(존 내쉬)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며칠 후 조니와 마사는 아버지에게서 22구경 소총 사용법을 배웠다. (……) 잿빛 구름 아래 낮게 엎드린 마을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은 이곳 웨스트버지니아의 마을을 점령할 때까지 공격을 계속할 것이다. 이곳이 비록 외지고 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막강한 미국의 전력을 무력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석탄 열차를 폭파하는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 정말이지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열차를 폭파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이 도시를 산산조각 내고, 남자들을 죄다 잡아가고, 양민을 학살할 것이다. 너희들 같은 학생도 죽일지 모른다. 너희가 이 총을 쏠 수 있다면, 잡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물리치고 멀리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군이 구해주러 올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된다. 후일 내쉬가 도처에서 외계 침략자의 비밀스러운 흔적을 발견하고 오직 자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그는 불안에 떨고 진땀을 흘리며 몇 날 며칠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오후의 이날만큼은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흥분했고 행복해했다.
-실비아 네이사, 신현용 ·이종인·승영조 역, 『뷰티풀 마인드』, 승산, 2002, 60~61쪽.
‘오직 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존 내쉬가 겪게 될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에드 해리스)의 환상은 냉전체제가 학습시킨 이데올로기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린 시절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넘볼 수 없는 뭔가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그런 어려운 일은 나만 할 수 있다는 긍지는 존 내쉬의 성정에 어울리는 환상이었다. 우주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소년들의 환상처럼 부풀어 오르는 ‘냉전 시대의 영웅’을 향한 불타는 의지는 언제나 혼자였던 존 내쉬에게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최고의 인간이라는 신념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존 내쉬의 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존 내쉬의 환경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미션,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오해를 잠재울 만한 초인적인 힘을 지니게 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최고의 인간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던 존 내쉬의 천성도 중요한 변수다. 영화 속에서 ‘빅 브라더’ 윌리엄 파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이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신념을 ‘완성’시키는 인물이다. 그의 인정을 받아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에 투입된다는 것은 존 내쉬에게 자신의 지식을 ‘이 사회를 지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긍지를 심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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