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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 3.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 3.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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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애도의 경우는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7.

 

 

남편의 임박한 죽음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트루디.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대상들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본다. 그녀의 일상을 둘러싼 모든 흔적들이 하나하나 남편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애도우울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애도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고, 우울은 사라진 대상과 혼자 남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아 있는 나날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도, 자신의 상실감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도 없다. 그녀는 어떤 변화도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그저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 심상하게 행동한다.

 

애도가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슬픔의 극복 과정이라면 우울증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마비 과정이다. 지금 트루디는 미래의 상실을 이미 처연하게 앓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그 다음의 삶을 준비할 수가 없다. 자신과 남편을 분리할 수 없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발전적인 애도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를 잃는다면 애도조차 불가능한 것. 그의 상실이 곧 나의 상실이기에 도저히 그를 향한 마음의 화살표를 거둘 수 없는 것.

 

트루디는 불가능한 애도와 불가피한 우울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애도에도, 사라진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스스로의 자아를 파괴하는 우울에도 완전히 빠질 수 없다. 그녀는 애도의 희망을 가지지 않지만 우울증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베를린에 살고 있는 아들과 딸에게 마지막으로 무언의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자식들의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며 더욱 깊은 슬픔에 빠진다. 자식들은 무슨 바람들이시래? 이렇게 불쑥?”하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부모님이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얼마나 오래 계실 것인지부터 걱정한다. 오히려 레즈비언인 딸의 여자친구 프란치만이 트루디와 루디 부부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정작 아들과 딸은 바쁘다며 부모님을 방치하고, 처음 보는 낯선 아가씨 프란치가 루디 부부의 베를린 투어를 책임진다. 시골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부부에게 거대한 도시 베를린은 한없이 불편하고 낯설기만 하다.

 

마치 당신들은 절대 우릴 몰라요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듯, 부모님을 귀찮은 짐짝처럼 밀어내는 아들딸의 모습을 보며 트루디는 절망한다. 그저 마지막 며칠을 함께 보내고 싶을 뿐인데, 그조차 불가능하다니. “애들 어릴 때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지금은 아예 저 아이들을 잘 모르겠어요.” 남편 루디는 쓸쓸한 표정으로 묻는다. “애들한테 실망한 거야?” 트루디는 체념 섞인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냥 더는 쟤들을 모르겠어요.” 루디는 오래전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내를 위로한다. “, 다들 건강하잖아. 그럼 됐지, 뭘 바래.”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과 자식들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시간의 장벽을 절감한다. 남편이 떠나고 혼자 남을 자신의 생이 얼마나 허허로울까, 그 아득한 미래의 고독이 더욱 명징(明澄)하게 인식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단지 치료해야만 하는 질병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울증자가 지닌 비범한 예지력을 간파했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자가 진정한 자기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마치 햄릿처럼. 차라리 프로이트는 왜 인간이 우울증에 걸리고 나서야, 질병에 걸리고 나서야 그런 소중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

 

 

아주 격앙된 자기 비난 속에서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를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독립심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또 오로지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데만 급급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때 어쩌면 그는 진정한 자기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왜 사람은 병에 걸리고 난 뒤에야 그런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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