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1. 알고는 싶지만 배울 순 없는 이별학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내 몸 안에 있지만, 내가 더 이상 없으면 그 사람은 어디 있게 되지? 내게 남은 그녀의 기억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중에서
내게 허락된 모든 정규교육을 마친 후 나는 자주 이런 몽상에 빠지곤 했다. 만약 나에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새로운 과목을 개설할 자유가 주어진다면 어떤 과목을 만들어낼까. 학교에서 배운 것이 결코 적지 않은데, 왜 이렇게 나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지,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렇게도 많은 과목이 있었는데 정작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에 섰을 때는 어떤 과목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내게 가장 필요한 과목은 ‘사람들을 잘 만나고 잘 헤어지는 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관계학’이라는, 우리가 매일 고민하지만 결코 교과서와 같은 정제된 지식의 통로를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과목.
나는 모든 만남에 서툴렀다. 친구를 좋아하면 ‘적당히’ 좋아할 줄을 몰랐다. 애인처럼 친구를 좋아하다가 정작 친구와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수도 없이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곤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치열했던 갈등과 서운함은 휘발되어버리고 누군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만 남곤 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니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주로 같은 여자이며 거의 동갑내기로만 이루어져있던 여고생의 인간관계를 벗어나니, 호칭과 인사법부터 천차만별인 엄청난 인간관계의 네트워크가 펼쳐졌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더욱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니 사람을 만나는 법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잘 헤어지는 법임을 알게 되었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고 있음’을 마음속 깊이 인정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만남보다 더 어려운 이별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내게 가장 필요한 과목은 ‘이별학’이 아니었을까.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모든 헤어짐은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어느새 이별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기를 쓰고 타인을 ‘덜’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파니핑크』의 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은 내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이별학’을 강의하는, 지상에 없는 교과서 같은 작품이었다. 이 아름다운 교과서에는 엄격한 교훈도 암기할 공식도 없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이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남은 생을 다 바치는 한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이별학’의 창시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처하는 인간의 두 가지 자세를 언급한다. 첫 번째가 대상의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대상의 상실을 자아의 상실로 흡수해버리는 우울증이라고. 애도(Trauer)가 이별을 극복하기 위한 영혼의 제스처라면, 우울증(Melancholia)은 이별의 원인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린 채 어느새 ‘잃어버린 대상’을 ‘잃어버린 자아’로 대체해버린다. 잃어버린 대상을 향해 최선을 다해 슬퍼하지 못하면 결국 그 못다 한 슬픔의 화살표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버리는 것일까.
예전이라면 시인이나 철학자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을 우울증자에게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자신 속으로의 끊임없는 침전은 그에게서 리비도라는 촉수가 손상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세계에 무관심하며, 세계 또한 그에게 무관심하다. 우울증자에게는 인간 고유의 기적 같은 능력, 즉 세계를 리비도의 마법에 빠지게 만드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그에게 능력이 있다면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마술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세계를 무감각한 무기질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검은 마술.
-맹정현, 『리비돌로지』, 문학과 지성사, 2009.
2. ‘바람직한’ 이별은 가능할까
애도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똑같은 종류의 상실감이 애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4쪽.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 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그건 구경도 아닐 테니까. 그이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남편 루디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고를 들은 날, 아내 트루디의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의사는 이미 치료시기를 놓쳤음을 알리고, 남편과 함께 여행이나 작은 모험을 시도해보라고 충고한다. “남편은 모험을 싫어해요.”
트루디는 남편의 취향과 습관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모험은커녕 아주 작은 변화도 싫어하는 남편은 20년 동안 딱 한 번 독감을 앓은 것 빼고는 아픈 적조차 없었다. 남편 루디는 우체국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폐기물 관리국장으로 장기근속 중이다. 남편의 회사에는 폐기물 관리국에 딱 어울리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어 있다. “재활용은 좋은 것이고 재사용은 더욱 좋다.” 루디의 성격은 바로 이 문장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고,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만 같은, 지나치게 빈틈없는 사람이다. 그는 뼈아픈 상실과는 거리가 먼, 평화롭고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아내 트루디가 평생 가고 싶어 했던 일본은 막내아들 칼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녀의 잃어버린 꿈 ‘부토(Butoh, 舞踏)’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죽음의 춤, 폐허의 춤, 그림자의 춤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의 현대 무용 부토는 아내 트루디가 평생 꿈꾸던 이상이었다. 트루디는 남편에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후지산을 보고 싶지 않느냐고 간절한 표정으로 묻는 아내 앞에서 남편은 지나치게 심드렁하다. “후지산은 그냥 산일 뿐이야.” 그래도 막내아들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아내의 말에, 남편은 더욱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녀석이 이쪽으로 오는 게 돈이 덜 들걸.” 남편은 모든 것을 ‘퇴임 후’로 미룬다. 아직 자신의 몸 상태를 모르는 남편은 언제나처럼 모든 일을 ‘다음’으로 미룬다. ‘다음’이 없음을 아는 트루디의 마음은 무너진다.
차마 남편에게 ‘당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대요’라고 말할 수 없는 아내의 눈에서는 남모르는 눈물이 그렁하다. 그녀는 무사태평인 남편의 등 뒤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남편의 옷을 다리다가, 아들에게 전화해 심상하게 안부를 묻다가, 자신도 모르게 툭툭 눈물을 흘린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힘겹게 포기했던 자신의 오랜 꿈, 그 꿈보다 사랑했던 남편을 잃는다는 생각에 그녀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없는 삶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트루디. 그녀는 자신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듯, 감각의 마비 상태에 빠진다. 그를 잃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 자체는 병리적이지 않으며 지극히 ‘정상적’인 슬픔의 극복 과정일 뿐 아니라 상실을 극복하는 발전적 행위이기도 하다. 반면 우울증은 자기를 파괴하는 부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애도와 우울증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자기애의 소멸’이다. 우울증자는 사랑하는 대상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상에게 집중되던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고 차라리 현실에 등을 돌리며 사라진 대상에 집착한다. 프로이트는 ‘고통의 경제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울증은 물론 애도 또한 ‘효율적’이지는 않다고 진단한다.
프로이트는 현실의 명령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타협이 왜 그토록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고통을 우리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엄청난 감정의 ‘낭비’를 겪는다 해도, 일단 ‘애도’의 과정을 극복한 자아는 언젠가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다시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고, 불면증에서 놓여나며, 웃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울증은 ‘대상의 상실=자기의 상실’이 되어버릴 뿐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까지 치달을 수 있다.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4쪽.
3.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길을 잃다
애도의 경우는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7쪽.
남편의 임박한 죽음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트루디.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대상들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본다. 그녀의 일상을 둘러싼 모든 흔적들이 하나하나 남편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애도’도 ‘우울’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애도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고, 우울은 사라진 대상과 혼자 남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아 있는 나날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도, 자신의 상실감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도 없다. 그녀는 어떤 변화도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그저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 심상하게 행동한다.
애도가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슬픔의 극복 과정이라면 우울증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마비 과정이다. 지금 트루디는 미래의 상실을 이미 처연하게 앓고 있다. 그녀는 남편이 없는 그 ‘다음’의 삶을 준비할 수가 없다. 자신과 남편을 분리할 수 없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발전적인 애도’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를 잃는다면 애도조차 불가능한 것. 그의 상실이 곧 나의 상실이기에 도저히 그를 향한 마음의 화살표를 거둘 수 없는 것.
트루디는 불가능한 애도와 불가피한 우울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슬픔을 극복하는 ‘애도’에도, 사라진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스스로의 자아를 파괴하는 ‘우울’에도 완전히 빠질 수 없다. 그녀는 애도의 희망을 가지지 않지만 우울증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베를린에 살고 있는 아들과 딸에게 마지막으로 무언의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자식들의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며 더욱 깊은 슬픔에 빠진다. 자식들은 “무슨 바람들이시래? 이렇게 불쑥?”하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부모님이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얼마나 오래 계실 것인지부터 걱정한다. 오히려 레즈비언인 딸의 여자친구 프란치만이 트루디와 루디 부부의 외로움을 알아본다. 정작 아들과 딸은 바쁘다며 부모님을 방치하고, 처음 보는 낯선 아가씨 프란치가 루디 부부의 베를린 투어를 책임진다. 시골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부부에게 거대한 도시 베를린은 한없이 불편하고 낯설기만 하다.
마치 ‘당신들은 절대 우릴 몰라요’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듯, 부모님을 귀찮은 짐짝처럼 밀어내는 아들딸의 모습을 보며 트루디는 절망한다. 그저 마지막 며칠을 함께 보내고 싶을 뿐인데, 그조차 불가능하다니. “애들 어릴 때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지금은 아예 저 아이들을 잘 모르겠어요.” 남편 루디는 쓸쓸한 표정으로 묻는다. “애들한테 실망한 거야?” 트루디는 체념 섞인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냥 더는 쟤들을 모르겠어요.” 루디는 오래전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아내를 위로한다. “뭐, 다들 건강하잖아. 그럼 됐지, 뭘 바래.”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과 자식들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시간의 장벽을 절감한다. 남편이 떠나고 혼자 남을 자신의 생이 얼마나 허허로울까, 그 아득한 미래의 고독이 더욱 명징(明澄)하게 인식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단지 치료해야만 하는 질병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울증자가 지닌 비범한 예지력을 간파했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자가 진정한 자기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마치 햄릿처럼. 차라리 프로이트는 왜 인간이 우울증에 걸리고 나서야, 질병에 걸리고 나서야 그런 소중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
아주 격앙된 자기 비난 속에서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를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독립심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또 오로지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데만 급급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때 어쩌면 그는 진정한 자기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왜 사람은 병에 걸리고 난 뒤에야 그런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48~249쪽.
4. 애도도 우울도 어쩌면 사랑을 지닌 자의 특권
정신분석 안에 인간의 가슴(heart)은 어디에 있는가? (……) 정신분석적 사고에서 가슴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에서 피분석자나 환자들에게 말할 때 가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종종 생생한 반응과 함께, 무언가가 소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가슴의 필요들, 바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방어하고 있는 그것의 상처들을 불러일으킬 때, 거기에는 대체로 생생한 충격이 발생한다. 그것은 확실히 이드나 에고나 수퍼에고를 말하는 것보다, 심지어는 무슨 리비도적 자아니 또는 내적 파괴자로 인격화된 반-리비도적 자아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정서적으로 더 잘 접촉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이다.
-수잔 캐버러-애들러 지음, 이재훈 옮김, 『애도』,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9, 16~17쪽.
트루디는 베를린에서 오랜만에 부토 공연을 관람한다. 온몸으로 죽음 저편의 세계를 그려내는 아티스트의 몸짓은 마치 남편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트루디의 마음처럼 소리 없는 절규로 가득하다. 트루디의 눈빛은 이미 삶의 저편, 피안을 바라보는 눈빛처럼 아득하다. 그녀의 시선은 단지 부토를 추는 아티스트의 몸짓이 아니라 부토가 표현하는 죽음 저편의 세계에 이미 가닿은 것만 같다. 그녀는 부토의 춤사위와 함께 죽음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표정으로, 공연 시간 내내 무용수의 몸짓과 하나가 되어 마음으로 춤을 춘다.
한편 그녀가 홀로 다가오는 죽음의 망령과 싸우고 있는 동안 자식들은 여전히 냉담하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녀를 공연에 데려갈 생각 또한 없었다. 엉뚱하게도 딸의 여자친구 프란치가 트루디를 공연장으로 안내한다. 트루디는 프란치의 예상 밖의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남편과 자식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듯하여 마음이 무겁다. 그녀의 아들딸들은 부모에 대한 사랑이 별로 없으므로 애도조차 불가능한 것일까.
자식들이 저마다 바쁘다며 아무도 트루디 부부를 챙겨주지 않자 두 노인은 복잡한 베를린 거리를 더듬더듬 헤매며 점점 지쳐간다. 버스표를 끊을 줄 몰라 당황하던 남편 루디는 마침내 노여운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 “여보, 나 집에 가고 싶어져.” 트루디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한다. “한 놈도 시간 있는 놈이 없다잖아.” 낯선 베를린 거리를 헤매는 외로운 두 노인은 비로소 자신들에게는 이 거대한 도시가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는다. 트루디는 문득 남편과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래요, 우리 발틱으로 가요.” 발틱 해변, 남편이 언젠가 죽으면 그곳에 뿌려지고 싶다고 했던.
베를린의 마지막 밤. 트루디는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의사의 선고를 들은 날부터 이미 트루디의 불면증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남편과 자식들을 바라보며 트루디는 홀로 남아 걸어가야 할 저 수많은 나날들을 생각하며 아득해진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면 내게 닥쳐올 저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할 친구가 아무도 없겠구나. 너희들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이별을 슬퍼할 만한 아무런 마음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구나. 그녀의 자식들에게는 사랑이 없기에 애도도 불가능한 걸까. 사랑이 있어야 뼈아픈 상실도 있고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애도나 우울의 몸부림도 가능하다. 애도도 우울도 어쩌면 사랑을 지닌 자의 특권이 아닐까.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불면증은 그 상태의 경직성, 즉 수면에 필요한 전반적인 리비도 집중의 철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울중의 콤플렉스는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와 같이 모든 방향에서 리비도 집중을 끌어 모으고 자아가 완전히 빈곤해질 때까지 자아를 텅 비우게 된다. 이런 과정이 자아의 수면 욕구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프로이트, 윤희기 · 박찬부 옮김,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257쪽.
5. 너무 슬퍼서 슬프다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다
그녀는 슬픔 때문에 화석이 되었다.
-오비디우스
트루디는 남편과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마음속으로 혹독한 이별의 예식을 치러낸다. 그녀는 아름다운 발틱 해변에서 남편과 거닐며 깨달았을 것이다. 당신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눠왔지만 유일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트루디는 이 마지막 여행에서 그의 죽음 뒤에 펼쳐질 바닥없는 슬픔은 온전히 그녀만의 것임을 알게 된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트루디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 펼쳐질 기나긴 어둠의 나날들을 이미 속속들이 관찰한 듯 철저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그녀가 다녀올 수 없는 슬픔의 극한까지 홀로 걸어 들어간다. 아무도 그녀 마음에 새겨진 어둠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이별의 슬픔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공간이 사라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차라리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격정적인 슬픔을 조용히 억압하는 것이 보다 침착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장례식장에서도 ‘난 분명히 슬픈데 왜 눈물이 나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며 슬픔을 마음껏 표현하는 사람을 ‘우아하지 못하다, 촌스럽다, 교양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장례식장에서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고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슬픔의 에티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태도에서 발견되는 것은 ‘솔직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뭔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선입견이다. 게다가 슬픔의 눈물과 통곡을 쏟아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슬픔에 ‘승리’한 것은 아니다. 오늘 마음껏 울지 못한 슬픔은 언젠가 우리의 삶 어디에선가 적당한 자극을 만나면 오래된 지뢰처럼 속수무책으로 터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슬픔을 잘 참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은 슬픔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슬퍼서 슬프다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마비 상태가 아닐까.
트루디는 오랫동안 어떤 슬픔도 자신이 혼자 껴안고 견뎌야 한다고 믿어온 사람 같다. 가족은 물론 어떤 지인에게도 이 슬픔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 그녀는 남편의 등 뒤에서 남편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에야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당신은 앞으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뭘 하고 싶어요?” 트루디는 마치 남의 일인 듯 심상하게 질문한다. 아직 죽음에 대해 전혀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루디는 가볍게 말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들 하지. 하지만 뭘 어떻게 하겠어? 난 아무것도 다른 건 안 해, 아무것도. 그저 언제나처럼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와야지.” 트루디는 이렇게 남편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린다. 어쩌면 이미 슬픔의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인 트루디와 아직 슬픔의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루디와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리비도라고 부르는 사랑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 리비도는 성장의 초기 단계에 자아로 향해 있다. 비록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리비도는 나중에 자아에게서 벗어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그 대상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아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이 파괴되거나 상실되면 우리의 사랑의 능력(리비도)은 다시 해방되어 대신 다른 사랑을 찾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우리 자아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리비도가 그 대상과 분리되는 것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나타나는지는 불가사의한 것이고, 아직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만한 어떤 가설도 세워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리비도가 어떤 대상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상실했을 때 비록 다른 대체물이 있다 하더라도 애초의 그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슬픔이 생겨나는 것이다.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2004, 337~338쪽.
6. 그렇게들 흘러간다
검은 신이여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박인환, 『검은 신이여』 중에서
어김없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잠 못 이루는 밤, 트루디는 뜬금없이 남편에게 춤을 춰보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녀가 늘 입는 오렌지 빛 기모노 잠옷을 입은 채로, 그녀는 마뜩찮아 하는 남편의 손을 잡아 부토를 춘다. 마치 그들의 저물어가는 사랑을 향한 진혼곡처럼, 발틱 해변으로 몰아치는 사나운 파도소리를 반주 삼아. “한밤중에 춤을? 딴 사람들 다 자는데.” 영문을 모르는 남편 루디는 아내의 때 아닌 진지함에 놀라지만 아내의 몸짓이 자못 단호하여 할 수 없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부토의 춤사위에 서툴게 몸을 맡긴다. 이상하리만치 길었던 밤이 지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죽음을 앞둔 남편 루디가 아니라, 남편의 예정된 죽음을 아파하던 아내 트루디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무런 질병의 징후도 없었던 트루디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그제야 온 가족이 한꺼번에 모인다. 일본에서 일하느라 몇 년 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막내아들 칼까지, 실로 오랜만에 온 가족이 트루디가 누워 있는 관 앞에 모였다. 모두들 믿을 수 없는 표정들이다. “저렇게 관 속에 누워계시다니.” “난 한동안 엄마를 보지도 못했는데, 이젠 다시 볼 수도 없다니. 찾아뵙지 못하면, 도쿄에 모시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잠시 동안 어머니의 죽음을 추모하지만, 곧바로 아버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심한다. “이제 아빠는 어쩌지? 우리가 뭘 어떻게?” 자식들은 아버지가 무슨 귀찮은 짐짝이나 되듯이, 혹시나 아버지를 모실 책임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전가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자식들은 모두 저마다 바쁘다며 발인에도 참석하지 않고 각자의 갈 길로 흩어져버린다. 엉뚱하게도 딸의 여자친구 프란치가 홀로 아내를 땅속에 묻어야 하는 루디 곁을 지켜준다. 하관 기도를 해주실 신부님은 이 아가씨가 둘째딸 카롤린이냐고 물어보지만, 루디는 쓸쓸히 대답한다. “카롤린은 베를린에, 막내는 일본에 있습니다.” 평생 남편과 자식들에게 헌신했던 트루디였지만, 그녀가 땅속에 묻히는 날 정작 트루디가 그렇게도 애틋하게 챙겼던 자식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당황한 신부님이 장남 크라우스는 어디 있느냐고 묻자, 루디는 대답한다.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결국 딸의 여자친구가 없었으면 홀로 아내를 땅 속에 묻을 뻔했던 루디. 루디는 프란치를 집으로 데려와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내의 죽음조차 믿을 수 없는데, 그의 곁을 지켜주는 자식조차 한 명도 없다.
루디: 그 사람 베를린에서는 너랑 같이 본 그 부토 공연이 제일 좋았다고 하더구나. 너처럼 좋은 아인 처음 봤대.
프란치: 그렇지도 않아요……. 트루디 아주머니가 저한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얼마나 춤이 추고 싶었는지. 당신이 다른 무엇보다 얼마나 부토 무용수가 되고 싶어 했었는지. 그걸 배우러 얼마나 일본에 가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모든 것이 어떻게 틀어져버렸는지요. 잘 살아왔지만……. 어머님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어머님 안에 아무도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어머님이랄까. 그걸 제가 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루디: (강렬한 메이크업과 심플한 의상을 입은 채 부토 공연을 하고 있는 아내의 옛날 사진을 보여준다.)
프란치: (트루디의 춤사위가 그려내는 멋진 실루엣에 감탄하며) 이 모습이 정말 어머님이세요?
루디: 난 싫어했어. 너무 과격해서. 당황스러워서. 난 아내가 춤을 그만뒀으면 했지. (죄책감이 밀려드는 표정으로) 우린 그 사람을 여기 가뒀던 거야.
프란치: 그래도 어머님은 여기서 행복하셨어요, 분명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자리는 우리가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고통과 상처에 개방적일 수 있을 정도만큼만 그 자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 자기나 타자의 파괴로 인한 사랑의 상실은 대상 상실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통렬하고 분화된 후회의 아픔으로 느껴질 수 있다. 후회를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 능력은 고통을 자학적으로 즐기는 상태가 아니며(……) 슬픔을 씻어내고 떠나보낼 수 있는 능력을 발생시키는 요소이다. 그것은 애도하는 고통이요, 고통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견디는 것이다. (……) 자기가 분열에 의해 봉인되거나 억압에 의해서 닫혀버린다면, 진정한 비탄은 발생할 수 없다.
-수잔 캐버러-애들러, 이재훈 옮김, 『애도』,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9, 26~27쪽.
7.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가
우울증 환자는 ‘명명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어떤 말로도 의미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빼앗겼다고 느낀다. 이것이 우울증 환자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이유다. 이 사람은 말을 해야 할 아무런 의미도 보지 않는다.
-노엘 맥아피 지음, 이부순 옮김,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 앨피, 2004, 121쪽.
누군가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후에야 그 사람의 ‘의미’가 새롭게 밝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새로운 애도의 표어는 ‘표현할 수 없는 애도’를 단 세 글자로 압축하여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대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지못미’라는 세 글자만으로 남겨진 자의 슬픔은 축약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못미’라는 깔끔한 신조어는 아직 제대로 의미화될 수 없는 죽음을, 사라짐을, 소멸을 성급하게 타임캡슐에 담아 밀폐해버리고 싶은 심리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자의 삶마저 황폐화시키는 죽음은 결코 쉽게 의미화될 수 없다. 고통을 표현하는 어떤 절박한 언어도 먼저 간 이의 빈자리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규격화된 의미의 포장지 안에 가둘 수는 없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죽음을 견디기 위한 각종 이벤트를 발명해낸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형식이 개발될수록,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오히려 그 ‘새로운 죽음의 의미부여’에 상처받을 수도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형식이 날로 진화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더욱 삶으로부터 타자화하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유명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대한 죽음의 행렬은 기실 ‘저마다의 고통스러운 삶’을 애도하는 각자의 몸부림의 집합이 되기도 한다. 어떤 정교한 이벤트도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담아내기는 어렵다. 죽음은 추모의 형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이 남겨진 자의 가슴에 남기고 간 ‘상처’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빈자리’ 속에서, 오직 각자의 내면에서 철저한 고독 속에 경험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흔적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겐 그래서 ‘함께 슬퍼하는 사람’의 존재가 너무도 절실하다. 죽은 사람은 남겨진 사람의 가슴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자라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부활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애도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애도 자체도 ‘타자’를 필요로 한다. 내 슬픔의 창을 비춰줄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슬픔을 바라보고 내 슬픔을 객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대상을 상실함으로써 우리는 내 안의 다른 것들조차 함께 잃는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뿐 아니라 그와 ‘연관’시키고 있던 모든 가치와 무형의 감정까지도. 애도는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하나하나 뒤늦게 발견하게 만든다. 무의식의 서랍 속 깊숙이 숨겨져 있어 잃어버린 지도 몰랐던 기억과 대상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고고학적 유물처럼 해석하고 닦아내고 다시 보관하고 다시 의미 부여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애도이다.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명명할 수 있는 매체는 물론 언어일 것이다.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 앞에 모든 의욕을 상실한 루디. 그에게는 자신의 상실을 기호화할 수 있는 능력이 지금은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위로하려는 막내아들에게 말한다. “삶은 계속된다는 말은 말거라, 제발.”
내 환자들 중 내가 가장 몰두하는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일세. (……) 그 분석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힘들어서 이미 확립된 개념들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기능마저 마비시킬 정도라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걸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 내 자기분석은 여전히 중단상태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깨달았네. 그건 말일세. 나 자신은 분석함에 있어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얻어진(마치 외부의 타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과 같은) 지식들만을 활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네. 진정한 자기 분석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일세. 그렇지 않다면 신경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프로이트가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필립 그랭베르 지음, 김용기 옮김, 『프로이트와 담배』, 뿌리와 이파리, 2003, 127~130쪽.)
8. 이승에 실현된 저승의 그림자
칼: (어머니가 평생 와보고 싶어 하시던 도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찾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며) 왜 두 분이서 한 번도 안 와보셨어요?
루디: 시간이 있을 줄 알았지……. 네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걸 내가 빼앗았어. 죽은 사람에겐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죽은 자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각종 업무와 부채관계 정리, 유언의 집행, 장례 관련 업무들……. 그 수많은 죽음의 공식 절차가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는 가장 아픈 절차가 남아 있다. 바로 떠나간 사람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애도의 절차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장례 절차보다 더욱 참혹한 것은 바로 남겨진 사람들 각자의 내면에서 이제야 시작될 기나긴 애도의 과정이다.
아직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는 루디는 납득할 수 없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아내 트루디는 어쩌면 남편이 죽은 후에 낱낱이 거쳐야 할 고통스러운 애도의 의식을 홀로 마음속으로만 치러내다가 슬픔에 지쳐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수십 년 동안 아내와 살아왔던 정든 집이 한없이 낯설고 아득해지는 이 순간. 아내가 없는 이 집에서, 어느 구석 하나하나 아내의 손길과 아내의 추억이 묻어나지 않는 곳이 없는 이 집에서 루디는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그는 차라리 모든 것을 껴안고 살아가고 싶다. 아니, 정말 살아갈 수 있을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아내가 없는 매순간이 벼랑 끝을 내딛는 듯 두렵기만 하다.
루디는 부질없이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작은 집안에서도 마치 머나먼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멍한 눈길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직 아내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잠옷을 꺼내 침대 위에 깔아 놓기라도 해야 그나마 선잠에라도 들 수 있다. 아내를 보낼 수도 아내를 품을 수도 없는 이 집에서는 도저히 홀로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된 루디. 그는 비로소 아내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보기로 한다. 평생 쳇바퀴 돌 듯 집과 직장만을 오가던 루디가 드디어 고향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아내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 일본으로. 아내 트루디가 평생 보고 싶어 했던 도쿄의 벚꽃과 후지산의 절경이 있는 곳, 그리고 아내의 꿈이었던 현대 무용 부토의 본고장, 일본. 아내의 꿈이 닿지 못한 곳, 그곳으로 가자. 베를린에서도 길 잃은 아이처럼 헤매던 시골 노인 루디는 막상 베를린보다 더욱 낯선 일본에 도착하자 어쩔 줄을 모른다. 막내 칼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아버지를 거의 혼자 방치해둔다.
루디는 떠나간 아내의 손길을 그리워하며 도쿄의 밤거리를 헤매지만 아내를 닮은 그 어떤 대체품도 찾지 못한다. 도쿄에는 돈을 받고 거품목욕을 시켜주는 곳도 있지만 낯선 여인들의 친절한 손길은 떠나간 아내를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더욱 쓰라리게 환기시키고 만다. 자신의 벌거벗은 등을 열심히 밀어주는 여인들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며 뛰쳐나온 루디는 기어이 길을 잃어버리고, 그날 밤 거대한 도쿄의 밤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만다.
다음날 아침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낸 아들은 아버지의 뼈아픈 외로움을 알아보진 못하고 그저 아버지의 어두운 길눈을 탓하며 늙은 아버지를 타박한다. “도대체 어디 계셨어요? 미쳤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영원히 못 찾는 줄 알았어요. 여기가 얼마나 큰 도시인지 아세요? 깜빡하다가는 길 잃어요.” 아들은 결코 모른다. 어머니가 없는 한 아버지는 영영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철저히 길을 잃은 아버지에게 실종자가 되고 안 되고는 그리 커다란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대상을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주체는 자신이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참을 수 없는 면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 엮음,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6, 166~167쪽.
9. 아내의 영혼과 교신할 수 있는 내면의 주파수를 찾아내다
죽음의 풍부한 겉치레는 오늘날 후퇴했고, 그래서 죽음은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기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죽을 수 있으며, 불행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생명보험을 신뢰한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들 자신의 심층부에서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필립 아리에스, 이종민 옮김, 『죽음의 역사』, 동문선, 1998, 86쪽.
죽음 자체만큼이나 죽음에 소비되는 비용을 걱정하는 각종 준비들에 현대인은 익숙해졌다. 크고 작은 모든 죽음의 징후에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건강보험, 죽음 이후의 각종 의례를 준비하는 상조 회사들,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불안까지 걱정하는 생명보험,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죽음을 아름답게 회상하기 위한 메모리얼 파크까지. 죽음에 관한 각종 형식은 끊임없이 세련되고 우아해지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격화되었고, 죽음을 둘러싼 고통은 더욱 타자화되었다. 죽음 관련 산업이 세련되어갈 수록 우리는 죽음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루디는 가지고 있는 현금과 아내의 유품을 모두 챙겨 일본으로 왔다. 아내의 꿈의 화살표가 향하던 장소로 오면, 아내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러나 아내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일본에 와서도 막상 어떻게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아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내라면 일본에 와서 막내아들 칼에게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을까 싶어 ‘아내의 레시피’로 생애 최초의 요리도 해보고, 아내가 원했던 벚꽃놀이를 보러 가기 위해 칼과 함께 단체관광을 떠나기도 한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아내처럼 생각하고 아내처럼 행동하기’를 실천한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아내의 습관과 아내의 정보를 모두 동원해 봐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죽어간 아내의 마음에 가닿을 수 없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고독해진다. 떠나간 자의 고독에 가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남겨진 자의 고독은 더욱 심화된다.
루디는 아내의 삶을 단지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아내의 꿈을 되살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만의 내면의 예식, 애도의 제의를 시작한다. 전형적인 이성애자이며 평생 모범적으로 근속한 모범 공무원이며 아주 사소한 변화조차 싫어하는 보수적 인물인 그가, 아내의 스웨터를 걸치고 치마를 두르고 목걸이까지 장착한 채 드디어 ‘진정한’ 벚꽃놀이를 시작한다. 주위를 돌아보고 아무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코트 안에 숨겨진 아내의 옷을 드러내 보이며 거리 가득 흐드러진 아름다운 벚꽃의 향연을 보여준다. 그의 몸 위에 입혀진 아내의 영혼이 저 아름다운 벚꽃을 실컷 감상할 수 있도록. 비로소 루디에게는 진정한 혼자만의 애도가 시작된 것이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루디 앙게마이어만이 해낼 수 있는 아내 트루디를 위한 애도가.
비로소 루디는 아내와 교신하는 작은 소통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과정을 기입 혹은 통합(incorporation)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잃어버린 대상을 자신의 삶 안에 기입하는 행위다. 떠나간 이의 ‘죽음’을 남겨진 자의 ‘삶’ 속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만드는 것. 프로이트가 말한 ‘통합’은 잃어버린 대상이 남겨진 자의 육체에 보존되는 과정이다. 죽어간 그녀의 습관과 성향 하나하나를 자신의 몸속에 이식하는 루디의 눈에서는 그제야 전에 없던 활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비로소 아내의 영혼과 교신할 수 있는 내면의 주파수를 찾아낸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대상을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주체는 자신이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참을 수 없는 면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 엮음,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6, 166~167쪽.
10. ‘과격하고 당혹스러움’과 ‘아름답고 사랑스러움’ 사이
루디: (인사불성으로 취해 아버지에게 대드는 아들에게) 언제 이렇게까지 마셨니?
칼: 다들 항상 아빨 챙겨야 하고, 아빤 항상 주인공이셔야 하죠. 엄만 항상 말씀하셨죠. 네 아빨 생각해! 불쌍한 네 아빠! 아빨 좀 가만 두렴! 피곤하셔! 너무 열심히 일해서 사무실 뜨기도 힘드셔!
루디: 됐다. 그만해라.
칼: 아버진 평생 그렇게 일에 숨어 지내셨죠! 진짜 엄마를 알지도 못하고! 아빤 엄마를 몰랐어요! 바보 같은 아빠. 나가요! 쓰레기차에나 가요! 거기 소속이잖아요. 재활용도 잊지 말구요!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방』은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겪는 슬픔을 그려낸다. 부부 금슬도 더없이 좋았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남매도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이 가족은 아들이 죽은 후로 급격히 붕괴되어 간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고사’임이 분명하지만 부모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탓처럼 느껴진다. 스스로를 자책감으로 학대하는 부부는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오빠가 죽은 후 자신을 돌보지 않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쌓여가는 딸은 점점 외로워진다. 이렇게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할퀴며 괴로워한다. 떠나간 자를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상실감을 서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격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아들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기에 최선을 다해 아플 수 있었고, 또다시 새로운 최선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의 가족들에게는 ‘회복’할만한 사랑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자상함이나 친밀감을 발견할 수 없었고, 어머니의 예술적 기질을 아버지가 가로막은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떠난 후 슬픔을 이겨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일 때가 많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닮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는 가족이 그 슬픔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막내아들 칼은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혼자 두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행방불명될 뻔하자 아버지에게 이름표와 전화번호를 달아주어 졸지에 아버지를 금치산자(禁治産者)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이름과 아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커다란 이름표를 목에 건 루디는 영영 길을 잃은 미아처럼 서글픈 얼굴이다.
칼은 아버지를 더 이상 맡아주기 힘들다는 사연을 전하기 위해 누나인 카롤린에게 전화를 건다. “날 미치게 하셔. 종일 주변에 앉아만 계시고. 나도 어쩔 줄 모르겠어. 시내에 볼만한 건 벌써 다 보셨어. 매일 어떻게 이벤트를 생각해내? 시간도 없는데.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거치적거리셔. 이상하시고. 아빠가 현금을 몽땅 다 가져 오신 거 알아? 엄마 옷도 가져오셨어. 그래, 진짜. 치료가 필요하신 것 같아. 못 견디시겠나봐. 나도 못 견디겠어. 누나가 좀 맡아줘.” 루디는 그저 홀로 아내를 그리워했을 뿐인데 그것조차 자식들에게 부담만 된다는 것을 알자 고통스럽다. 그는 자신의 몸에 찾아온 이상 징후를 느끼며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조금만 더 머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느 날 혼자 공원을 산책하던 루디는 벚꽃이 흐드러진 연못 건너편으로 가녀린 소녀가 하늘하늘 춤을 추는 모습을 발견한다. 루디의 눈에서는 반가움과 그리움이 일렁인다. 바로 저것이다! 그녀가 추는 춤은 바로 부토였다. 평소의 루디였다면 그저 부랑자 소녀의 안쓰러운 구걸 행각으로밖에 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괴상하고 과격해 보였던 부토가 저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었구나. 루디의 눈길은 사랑스러운 소녀의 춤사위에서 떨어지지 못한다. 마침내 루디는 아내 트루디가 사랑했던 것을, 그가 ‘과격하고 당혹스럽다’고 생각했던 부토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아내와 교신하는 가장 멋진 방법임을 알게 된다. 나도 저 소녀처럼 춤추고 싶다. 내 아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춤을. 당신의 육체를 이곳에서 찾을 수 없을지라도 당신의 목마른 흔적을 내가 언제든 재생할 수 있다면.
애도란 타자의 상실을 슬퍼하는 지속적 행위를 일컫는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은 채 그것을 기리고 겸허하게 성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애도작업을 기억 구성의 규범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타자의 상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타자를 애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은 소중한 그것의 상실이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나르시시즘적 ‘동일화’라는 퇴행적 심리에 빠져 소중한 그것이 아직도 내 곁에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결코 애도를 행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한다. (……) 애도란 상실된 과거에 대한 비판과 계몽을 슬픔과 연민의 감정에 결합시키는 의식적인 작업이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상실되어버린 그것은 계속적으로 우리 안에 살아 있게 된다.
-전진성, 『어떻게 부담스런 과거와 대면할 수 있는가』, 독일연구 제6호, 2003, 152쪽.
11. 그림자의 춤: 나를 벗어 너를 입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 (……) 오늘날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해야 할 개념도, 죽음의 순간이 지니고 있던 공적인 장엄한 성격도,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다. (……) 당연히 가족들과 의사의 첫 번째 임무는, 죽음을 면할 길 없는 환자에게 용태의 위중함을 은폐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더 이상 알아서는 안 되었다. 새로운 관습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요구했다. (……) “나는 적어도 그가 결코 죽음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라는 한 남편이나 한 친척의 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필립 아리에스, 이종민 옮김, 『죽음의 역사』, 동문선, 1998, 196~201쪽.
첨단의학이 발달하여 죽음의 주권을 ‘의학’이 쟁탈하기 이전. 전근대사회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일찍 죽거나 ‘사소한’ 질병으로 죽곤 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명확히 감지하여 죽음의 의식을 스스로 연출하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많은 친지들의 마지막 배웅 속에 자신의 못다 한 말을 차례대로 남기고, 자신이 믿는 종교적 의례의 든든한 비호 속에 죽어가는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우리는 보았다. 필립 아리에스의 말에 따르면 근대인의 죽음은 개인의 주체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진료의 중단’을 통해 획득되는 ‘기술적 현상’이 되었다. ‘고통 없이 죽는 것, 혹은 잠자면서 죽는 것’은 죽음의 이상형이 되었고 우리는 죽음과 독대하는 ‘바로 그 순간’을 꺼리는 문화 속에서 살게 되었다.
박탈당한 죽음의 주권. 그것은 특히 불치병을 선고받은 환자에게 더욱 치명적인 고통으로 나타난다. 전근대사회에서 죽는 사람도 물론 철저히 혼자였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듬직한 배웅 속에 이승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은 ‘혼자’ 죽는다. 오래 앓던 노인들은 가족의 배웅이 아니라 전문 호스피스의 간병 속에서 죽어간다. 의학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독거노인들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 속에 죽어가는 것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느낌보다 더욱 큰 고통이 아닐까. 죽음의 감지자도 죽는 자 스스로가 아니라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일 경우가 많다. 병을 앓던 이들은 병원의 감시 하에 ‘사망선고’를 받아야 죽음을 ‘인정’받는다. 죽음의 시점을 결정하는 권력은 의료기관에 있고 죽음의 뒤처리는 상조 회사들이 도맡게 되었으며 남겨진 자의 슬픔은 지나치게 간소화된, ‘촌스럽고 감정적인’ 애도를 배제한 절제된 격식에 가둬진다.
아내 트루디의 본심은 아니었지만, 루디 또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죽음의 주권을 본의 아니게 박탈당한다. 그는 점점 쇠약해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직감한다. 공원에서 부토를 추는 17살 소녀 ‘유’와의 만남은 그가 이 많지 않은 시간을 가장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안내자가 된다. ‘유’에게 자연스럽게 부토를 배우면서 루디는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몸의 자유’를 느끼게 된다. 팔다리를 오직 노동과 일상생활에만 사용해왔던 루디에게 ‘춤’이란 상상하기 힘든 유희였다.
그러나 부토를 추는 일본 소녀 ‘유’와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루디는 처음으로 자신의 새로운 신체 사용법을 익히게 된다. 끊임없는 노동으로 소모되는 피로와 권태에 찌든 신체가 아니라 춤을 추며 해방되는 신체의 기쁨을 배우게 된다. 그는 부토를 배우면서 조금씩 죽은 아내의 못다 한 꿈에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의 꿈을 향한 미메시스, 그녀의 못다 한 꿈에 빙의되기. 애도는 어쩌면 떠나간 이의 부재로 인해 황폐화된 ‘나의 삶’을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떠난 자의 못다 한 삶’을 뒤늦게나마 다시 살아내는 부활의 제의가 아닐까.
유: (자신의 춤사위를 보여주며 루디가 그녀의 실물이 아니라 그림자를 보도록 유도한다) 부토는 그림자의 춤이에요. 내가 아니라 그림자가 추는 거예요. 보세요. (루디에게 가벼운 춤동작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할아버지 그림자가 춤춰요. 난 그림자가 누군지 몰라요. (분홍색 수화기를 귀에 대며) 여보세요! 누구세요? 대답이 없네요. (뻣뻣한 루디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루디의 팔을 잡고 함께 움직여주며) 누구든 부토를 출 수 있어요.
루디: (한 번도 춤을 춘 적 없는 듯 난감한 몸치의 표정으로) 난 안 돼.
유: (천진하게 웃으며) 아뇨, 돼요, 누구든 돼요. 다들 그림자가 있잖아요. 젊은이와 늙은이, 여자와 남자……. 다들 살아 있으면서 다들 죽어 있어요……. 동시에요.
상실한 대상을 그녀/그 자신에 옮겨놓고 간직하는 우울증 환자처럼, 에고는 상실한 대상을 투사하고 간직한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대상은 에고 안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다. 즉 대상 리비도 집중은 동일시로 대체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고는 그것이 포기해야만 했던 모든 욕망의 저장소이다. 또한 프로이트가 말하듯 ‘에고의 특징은 그것이 포기된 대상 리비도 집중들의 침전물이며 그러한 대상-선택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사라 살리, 김정경 옮김,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앨피, 2007, 99~100쪽.
12. 내 온몸 구석구석이 당신이 사는 장소
유: 난 죽은 사람과 춤을 춰요.
루디: 그게 누군데?
유: 우리 엄마요
루디: 언제 돌아가셨니?
유: 일 년 전 어제요. 엄만 늘 전화를 좋아했어요. 분홍색 전화기요. 엄마는 항상 통화중, 가족들과요.
루디: 우리 집사람도 엄청 전화를 했지. 애들 셋과, 항상 통화중.
유: 이제 전 엄마와 통화중이에요. 언제나요. 엄만 제 속에 있어요.
열일곱 살 소녀 ‘유’는 집도 절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전혀 없어 보이지만, 늘 밝고 명랑한 미소로 춤을 춘다.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기운은 아내가 죽은 이후로 늘 춥고 외로웠던 루디의 마음을 감싸준다. 분홍색 전화기로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소녀의 춤. 그 사랑스런 광경을 보며 루디는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이 소녀처럼 부토를 출 수 있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은 아내와 통화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이제 깨닫는다. 이 소녀의 부토야말로 죽은 아내가 오래 전에 자신에게 보냈지만 이제야 도착한, 너무 늦게 개봉한 편지라는 것을. 아내는 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그 편지를 한 번도 주의 깊게 뜯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주춤주춤 소녀에게 다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춤을 배우는 루디. 그는 소녀의 춤사위를 통해 점점 가벼워지는 자신의 몸을 느낀다. 살면서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던 춤의 세계. 아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함께 관람조차 해주지 않았던 부토. 그는 소녀를 만난 후 집안에서 청소를 하다가도 빗자루를 들어 부토의 동작을 연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그 평범한 빗자루가 죽은 아내와 교신하는 마법의 안테나라도 된 듯. 그는 빗자루를 높이 추어올려, 수줍지만 분명하게 부토의 춤사위를 빚어낸다.
유: 할머닌 어디 계세요?
루디: 난, 몰라…….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유: (춤 동작을 가르쳐주며) 느껴보세요, 할머니의 기억을요. 할머니와 나눴던 예전의 추억을요. 그리고 천천히 바람을 느껴요. 그리고 저기 저 꽃들을 봐요. 만발한 꽃들. (품안에 안는 동작을 하며) 그 꽃들을 이 품 안에, 안고, 안고, 또 안아요. 네, 그렇게, 안아요! 그러면, 많은 그림자가 보이죠? 할아버지 안에요. 이렇게 하면, 그림자가 사라져요. 그 그림자를 잡아요. 그림자를, 잡아요, 잡아요, 잡았다! 그림자를 붙잡고, 그림자를 느껴요. (루디가 무거운 코트를 입어 더욱 춤동작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 웃으며 코트를 벗겨 주려 한다) 춤을 출 때 코트는 벗는 게 나아요.
루디: (코트를 벗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한사코 거부하며) 안 돼, 안 돼!
유: (살포시 웃으며 할아버지의 코트를 벗겨드린다. 좀더 편안하게 춤출 수 있도록. 그런데 할아버지의 코트 속에 숨겨진 여자용 스웨터와 치마를 보자 흠칫 놀란다.)
루디: (치부를 들킨 듯 당황하며)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아내야…….
소녀는 할아버지를 전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이해한다. 내 안에 돌아가신 엄마가 여전히 살고 있듯이, 할아버지의 마음에도 할머니가 언제나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이제 루디에게 소녀의 부토는 아내와 좀더 가까이, 길고 수다스럽게 통화할 수 있는 영혼의 메신저가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한탄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아내와의 교신에 언제든 성공할 수 있는 ‘직통 라인’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는 ‘여보, 내가 여기 있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고 항변하는 듯 애처로운 눈길로 사물을 바라보았다. 이제 소녀를 만난 후 루디는 편안해졌다. 여보, 당신이 아직 여기 있구나. 내 온몸 구석구석이 당신이 사는 장소이구나.
프로이트의 유용한 개념들
애도: 실제 상실의 반응
우울증: 상상된 상실의 반응
동일시: 누군가가 다른 누구 혹은 무언가(상실한 대상)와 동일시하는 과정. 동일시는 투사 혹은 기입을 통해 발생한다.
투사: 외부 세계의 대상이 에고로 옮겨지고 보관되는 과정
기입(incorporation): 대상들이 육체의 표면에 보존되는 과정
-사라 살리, 김정경 옮김,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앨피, 2007, 99쪽.
13. 나는 너야(I am you)
루디: (길을 걷다가 ‘Free Hug’ 팻말을 든 젊은이가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본다)
젊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프리 허그! 공짜로 안아드립니다.
루디: 정말 공짜라고요?
젊은이: (웃으며) 네.
루디: (그래도 의심이 가지지 않은 듯 주춤주춤 서성거린다)
젊은이: (자신도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팔을 벌린다)
루디: (주춤주춤 다가가 젊은이에게 안긴다)
젊은이: (루디를 따뜻하게 안아 준다)
루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습니다.
평생 집과 직장만을 오갔던 모범 사원 루디,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를 함께 관람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던 루디, 춤이나 노래 같은 유희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루디. 그가 변하고 있다. 그는 부토 소녀 ‘유’에게 춤을 배운 후부터 타인을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평생 러닝머신을 달리듯 똑같은 인생만 고집했던 루디에게 아내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세상인지도 모른다. ‘프리 허그’라는 생소한 퍼포먼스에 불현듯 몸을 맡기는 루디의 입가에는 어색하지만 뿌듯한 미소가 스쳐간다.
단지 아름답게 흩날리는 벚꽃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천의 인파들, 그 속에서 마치 타고난 천직인 양 부토를 추고 있는 어린 소녀, ‘프리 허그’가 자신의 소명인 듯 열심히 낯선 행인들을 안아주는 젊은이.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죽은 아내가 진정 보여주고 싶어 했던 ‘다른 세상’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것들,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들을 보며 루디는 매일 똑같이 살아온 자신의 삶이 다른 무늬로 재조립되는 것을 느낀다. 죽은 아내를 이해하는 길은 곧 이 세상 사람들, 나와 다른 타인들을 이해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루디: 넌 이름이 뭐니?
유: 유(Yu)!
루디: (소녀가 you라고 말한 것으로 착각하고) 아니, 나 말고 너(you)말이야.
유: 제 이름이 유(yu)에요! (‘I am yu!’라는 소녀의 문장은 관객에게 ‘I am you!’로 들린다.)
루디: 네가 나라고?(You are me?)
유: 제 이름이 유라고요.
루디: 하, 그래?
유: 할아버지는요?
루디: 루디!
유: 루디? 루, 디. 루디! 기차가 와요. 어서 타세요!
소녀의 이름이 ‘you’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루디가 잘못 알아들은 문장, ‘I am you’야말로 이 영화 전체에 아련하게 깔린 복화술이기 때문이다. 루디는 생면부지의 소녀 ‘유(yu=you)’에게서 ‘나’를 본다. 루디는 소녀를 처음 보지만, 죽은 엄마와 매일 통화한다는 이 소녀의 슬픔을 너무도 잘 안다. 죽음의 고통을 차라리 아름다운 춤으로 승화시킨 이 소녀에게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들에게는 그저 춤으로 밥을 버는 걸인처럼 보이겠지만 그녀에겐 이 덧없는 춤이 엄마와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루디는 알아준다.
루디는 저 어린 소녀가 도대체 집도 절도 없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녀를 미행한 루디는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유를 발견한다.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천막이지만 안팎을 깔끔하게 청소하는 소녀의 침착하고도 경건한 표정을 보자 마음이 시려온다. 루디는 이 소녀에게 묵을 곳을 마련해주고 싶다. 내 아픔을 진정으로 알아준 이 소녀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루디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소녀를 무작정 아들의 집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막내아들 칼은 강경하다. “집에선 저만의 공간이 필요해요! 저 나이에 거리로 나왔다면, 그건 자기가 선택한 거라고요.” 루디는 소녀가 아직 어린 아이라며 아들의 인정에 호소하지만 칼은 단호하다. “절 믿으세요. 저 아이가 선택한 삶이라고요!”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유는 말없이 떠난다.
루디는 아들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소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 한때 그의 눈에는 아내가 떠나버린 세상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폐허처럼 보였다. 그는 평생 해온 대로 각종 쓰레기를 재활용 등급에 따라 정확히 분류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남은 아내의 유품을 어떻게 분류하고 처리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소녀의 부토를 보며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는 저 소녀의 춤에 등장하는 저 코드 뽑힌 전화기처럼, 저렇게 연결될 수 있겠구나. 굳이 전화선에 연결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통화할 수 있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아득한 거리. 당신을 기억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는 한, 당신이 남긴 모든 흔적은 아름답게 재활용될 수 있겠구나. 이제야 알 거 같다. 모든 버려진 것들, 이제는 ‘쓸모’를 잃어버린 모든 유품들, 한 사람의 삶이 남기고 간 덧없는 잔해들이야말로 죽은 이의 흔적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거처임을. 당신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조차도 당신의 부재가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내 작업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뉴욕에 온 이유는 이곳이 가장 황량하고 가망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깨진 것과 무질서가 보편화되어 있다. 당신은 그것을 보기 위해 눈만 뜨면 된다. 파멸된 사람들, 깨어진 것들, 파편화된 생각들. 도시 전체가 쓰레기더미다. 하지만 내게는 그곳이 최적의 장소다. 나는 거리를 끝없는 물질의 원천으로, 부서진 물건들의 끝없는 저장고로 발견했다. 매일 나는 종이봉투를 들고 옮겨 다녔고 연구할 가치 있는 대상들을 수집했다. 내가 발견한 물건들은 그 사이에 수백 가지로, 폭발한 것에서부터 터진 것, 조각이 난 것에서부터 쥐어짜진 것, 짓눌러 부서진 것에서 썩어빠진 것에 이르기까지 쌓였다. 그럼 당신은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실 건가요? 나는 그 물건들의 이름을 지어주지요. 이름을요? 나는 그 물건들에 딱 맞는 말들을 만들어내지요.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중에서
14. 진정한 애도의 순간
상실된 대상의 그림자가 주체에게 드리워진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리비도의 상당 부분을 탐구에 대한 충동으로 승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 중에서
‘애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어쩌면 ‘함께 슬퍼할 사람’을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가장 비슷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 혹은 나의 아픔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고 다만 그 끝나지 않는 슬픔의 통로를 함께 나란히 걸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 애도의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것은 이 슬픔의 늪을 건너가는 데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루디는 비로소 그 ‘슬픔의 친구’를 찾아낸 것이다. 부토 소녀 유와 함께 루디는 아내를 찾아 떠나는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기로 한다. 그녀와 함께라면, 이 마지막 여행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 아내가 여행하고 싶어 해. 너도 같이 가줄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루디는 잠든 막내아들 칼에게 말없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아내의 유품과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 생의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다.
죽은 후에야 남편으로부터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의 꿈을 이해받게 된 아내 트루디. 트루디가 평생 가보고 싶어 했던 그 후지산. 루디는 후지산이야말로 루디가 죽은 아내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임을 깨닫는다. 아내와 평생 살아온 집 곳곳에 남아 있던 후지산의 풍경화는 어쩌면 아내가 끝내 추지 못한 부토의 이상적 무대가 아니었을까. 소녀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며 루디는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그러나 후지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부토 소녀 유는 후지산이 ‘아주 수줍음이 많은 남자’라고 소개한다. “구름 속에서 잘 나오지도 않아요.” 정말 후지산은 그토록 기다리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설렘을 등 뒤로 한 채 구름 속에 한사코 그 눈부신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후지산 근처의 숙소에 묵으며 두 사람은 후지산이 수줍은 얼굴을 내미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창문부터 열어젖히지만 후지산은 여전히 구름 속에 숨어 그 찬란한 자태를 숨기고 있다. 그러는 동안 루디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아내는 남편의 병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제 루디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가는 길인데,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녀와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혼자만의 축제를 준비하는 루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애도의 제의를 준비하는 그의 마음은 1분 1초가 아쉽다.
장송 블루스(Funeral Blues)
W.H. 오든
세상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선도 끊어버려라.
개들에게 뼈다귀를 주어, 더 이상 짖어대지 않게 하라.
피아노를 침묵하게 하고, 북은 감싸버려라.
관을 가져오고, 조문객을 부르라.
비행기를 머리 위에 띄워 탄식하며
하늘에 글자를 쓰게 만들어라. ‘그는 죽었노라’고.
비둘기의 흰 목에 검은 상장(喪章)을 두르고,
교통순경에게 검정 목장갑을 끼워주어라.
그는 나의 동, 서, 남, 북이었고
나의 월, 화, 수, 목, 금이었고, 일요일의 휴식이었네.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네.
사랑은 영원하리라 생각한 나는 틀렸으니,
이제 별들도 필요 없다. 별빛도 모두 꺼버려라.
달은 감싸버리고 해도 없애버리라.
바닷물은 쏟아버리고 숲은 쓸어버려라.
이제 그 무엇도 소용없으니.
15.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시인은 지겹도록, 님과의 이별을 그렸다. 그것이 이 시인(김소월)에게는 슬픔을 슬픔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며, 슬픔의 표현이 슬픔의 해방이 되는 것으로써, 시는 자기 탐닉의 도구가 된다.
-김준오, 『김소월 연구』, 새문사, 1989, 45쪽.
다리와 팔은 잠들어 있는 기억으로 가득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슬픔의 치료책은 달콤한 행복의 마취제를 이용한 일시적 대증요법이 아니다. 슬픔은 슬픔의 ‘적절한’ 표현으로만 치유된다. 슬픔은 슬픔인 채로 승화되어야 한다. 슬픔이라는 고체가 혼란이라는 액체를 거쳐 기쁨이라는 기체로 변화하는 점진적 마술은 스스로를 향한 눈속임이다. 슬픔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아무리 호흡이 힘들더라도, 헤엄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식의 거짓 위안을, 누군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에게 구명조끼를 던져줄 것이라는 환상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대상의 결핍을 냉정하게 인정할 때, 좌절된 삶은, 포기된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슬픔을 승화시킨 표현 행위를 통해 슬픔을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루디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였다.
루디의 병세가 악화되어 밤새도록 사경을 헤맨 날. 그날 새벽 마침내, 그토록 수줍음을 타던 후지산은 그 장대한 위용을 드러낸다. 루디는 이제 ‘그날’이 왔음을 직감한다. 그는 세상과의 아름다운 작별을 위해, 죽은 아내와의 가슴 설레는 재회를 위해, 정성껏 분장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오랫동안 부토 공연을 해온 무용수처럼 스스로의 얼굴을 새하얗게 분장한 루디는 아내가 가장 아끼던 일본 의상 유카타를 걸친 채 후지산이 가장 잘 보이는 물가로 숨 가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만 더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 쇠약해진 나머지 걷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루디는 안간힘 끝에 후지산이 마치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물가에 선다. 마침내 생애 최초이자 최후로, 한 남자의 장엄한 독무(獨舞)가 시작된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곳에서, 마침내 그녀와 함께 부토의 춤사위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먼저 간 그녀가 못다 한 춤을 대신 추듯이, 그는 슬픔조차 잊고 부토에 열중한다. 그는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라는 배역을 연기하며 위대한 자연의 풍광을 거대한 애도의 무대 장치로 연출한다. 도대체 언제 저토록 아름다운 춤 동작을 연마했나, 관객이 놀라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쌍무(雙舞)를 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로소 만난 두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미처 함께 하지 못한 춤사위를 이제 마음껏 함께 나눈다. 부토 소녀의 개인교습과 아내의 어깨너머로 배운 춤사위는 지금 지상과 천상을 잇는 부토의 무지개를 만들고 있다. 비장한 애도의 제의가 접신(接神)의 축제적 희열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그의 슬픔은 마침내 불가능한 춤으로 승화되었다. 생을 다 태워도 모자랄 사랑은 그렇게 아름다운 춤으로 남김없이 연소되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좌절된 사랑은 억압과 고착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승화라는 탈출구를 찾게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창조적 예술은 본질적으로 좌절된 리비도의 ‘승화(sublimation)’라는 측면을 지닌다. 창조적 예술 활동을 통한 승화는 결국 ‘불가능’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는 대상의 결핍과 공백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술에서 ‘구원’을 볼 때 우리는 누군가의 억압된 욕망이 승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행복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루디의 뻣뻣한 팔과 다리에 꼭꼭 숨어 있던 아름다운 춤사위의 해방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비상한다.
한편, 남겨진 가족들은 여전히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관에서 열여덟 살 여자애와, 여자 옷을 입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괴상한 죽음’을, 자식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심정을 이해하는 자식은 없고, “반년 사이에 우린 천애 고아가 됐네”라는 이기적인 한탄만이 남는다. 먼 훗날 그들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면, 그때쯤엔 비로소 죽음의 춤을 통해 하나가 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내의 유카타를 입은 채 숨진 루디를 직접 발견한 ‘유’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이 아름다운 춤을 직접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죽은 어머니와 매일 스스럼없이 통화하듯 루디 또한 그렇게 죽은 아내와 행복하게 쌍무를 춘 것이다. 루디는 오갈 데 없이 떠도는 유를 위해, 아니 온 마음을 다하여 자신과 함께 아내의 죽음을 슬퍼해준 유를 위해, 자신에게 아내와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부토의 길을 가르쳐준 유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현금을 선물로 남긴다. 어린 소녀는 의연하게 할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의 품에 무사히 할아버지를 인도한다. 이제 슬픔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죽은 어머니는 물론, 루디 할아버지와도 매일 통화하기 위해 변함없이 발랄하고 상큼한 그녀만의 부토를 공연한다. 그녀의 부토는 흩날리는 벚꽃을 닮았다. 그녀의 부토는 꽃잎처럼 하늘하늘 흩어져서, 이토록 무거운 죽음의 고통조차 가뿐하게 날려버릴 듯하다.
마지막 순간, 어느덧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춤추고 있던 아내를 만나는 순간, 아마도 루디는 평생을 합친 희열을 넘어서는 극도의 쾌락을 맛보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만큼이나 슬픈 것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부토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한다. 당신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첫사랑을 시작하듯 다시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사랑하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애도’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멋진 피날레가 아닐까. 이제 그는 전화기 없이도 그녀와 통화할 수 없다. ‘춤’이라는 아름다운 마음속의 베네치아를 찾았으므로. 날개 없이 나는 법을, 죽음에 대한 공포 없이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으므로. 피그말리온에게 갈라테이아가 ‘걸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상’이었던 것처럼, 루디에게 트루디는 ‘죽어서도 춤출 수 있는 단 하나의 무용수’였던 것이다. 슬픔조차 구원이었던 당신을, 이제는 놓아드린다.
정신분석의 지식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은 충동과 충동의 변형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정신분석은 생물학적 탐구에 자리를 양보한다. (……)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구체적인 제작능력은 ‘승화(sublimation)’ 과정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로서는 예술 창작의 본질 또한 정신분석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장진 옮김, 『예술, 문학, 정신분석』, 열린책들, 1999, 260쪽.
이젠 행복해요, 이별 없이……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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