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 온몸 구석구석이 당신이 사는 장소
유: 난 죽은 사람과 춤을 춰요.
루디: 그게 누군데?
유: 우리 엄마요
루디: 언제 돌아가셨니?
유: 일 년 전 어제요. 엄만 늘 전화를 좋아했어요. 분홍색 전화기요. 엄마는 항상 통화중, 가족들과요.
루디: 우리 집사람도 엄청 전화를 했지. 애들 셋과, 항상 통화중.
유: 이제 전 엄마와 통화중이에요. 언제나요. 엄만 제 속에 있어요.
열일곱 살 소녀 ‘유’는 집도 절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전혀 없어 보이지만, 늘 밝고 명랑한 미소로 춤을 춘다. 그녀에게서 스며 나오는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기운은 아내가 죽은 이후로 늘 춥고 외로웠던 루디의 마음을 감싸준다. 분홍색 전화기로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소녀의 춤. 그 사랑스런 광경을 보며 루디는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이 소녀처럼 부토를 출 수 있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은 아내와 통화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이제 깨닫는다. 이 소녀의 부토야말로 죽은 아내가 오래 전에 자신에게 보냈지만 이제야 도착한, 너무 늦게 개봉한 편지라는 것을. 아내는 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그 편지를 한 번도 주의 깊게 뜯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주춤주춤 소녀에게 다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춤을 배우는 루디. 그는 소녀의 춤사위를 통해 점점 가벼워지는 자신의 몸을 느낀다. 살면서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던 춤의 세계. 아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함께 관람조차 해주지 않았던 부토. 그는 소녀를 만난 후 집안에서 청소를 하다가도 빗자루를 들어 부토의 동작을 연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그 평범한 빗자루가 죽은 아내와 교신하는 마법의 안테나라도 된 듯. 그는 빗자루를 높이 추어올려, 수줍지만 분명하게 부토의 춤사위를 빚어낸다.
유: 할머닌 어디 계세요?
루디: 난, 몰라…….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유: (춤 동작을 가르쳐주며) 느껴보세요, 할머니의 기억을요. 할머니와 나눴던 예전의 추억을요. 그리고 천천히 바람을 느껴요. 그리고 저기 저 꽃들을 봐요. 만발한 꽃들. (품안에 안는 동작을 하며) 그 꽃들을 이 품 안에, 안고, 안고, 또 안아요. 네, 그렇게, 안아요! 그러면, 많은 그림자가 보이죠? 할아버지 안에요. 이렇게 하면, 그림자가 사라져요. 그 그림자를 잡아요. 그림자를, 잡아요, 잡아요, 잡았다! 그림자를 붙잡고, 그림자를 느껴요. (루디가 무거운 코트를 입어 더욱 춤동작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 웃으며 코트를 벗겨 주려 한다) 춤을 출 때 코트는 벗는 게 나아요.
루디: (코트를 벗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한사코 거부하며) 안 돼, 안 돼!
유: (살포시 웃으며 할아버지의 코트를 벗겨드린다. 좀더 편안하게 춤출 수 있도록. 그런데 할아버지의 코트 속에 숨겨진 여자용 스웨터와 치마를 보자 흠칫 놀란다.)
루디: (치부를 들킨 듯 당황하며) 이건……. 내가 아니라, 내 아내야…….
소녀는 할아버지를 전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이해한다. 내 안에 돌아가신 엄마가 여전히 살고 있듯이, 할아버지의 마음에도 할머니가 언제나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이제 루디에게 소녀의 부토는 아내와 좀더 가까이, 길고 수다스럽게 통화할 수 있는 영혼의 메신저가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한탄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아내와의 교신에 언제든 성공할 수 있는 ‘직통 라인’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는 ‘여보, 내가 여기 있는데 당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고 항변하는 듯 애처로운 눈길로 사물을 바라보았다. 이제 소녀를 만난 후 루디는 편안해졌다. 여보, 당신이 아직 여기 있구나. 내 온몸 구석구석이 당신이 사는 장소이구나.
프로이트의 유용한 개념들
애도: 실제 상실의 반응
우울증: 상상된 상실의 반응
동일시: 누군가가 다른 누구 혹은 무언가(상실한 대상)와 동일시하는 과정. 동일시는 투사 혹은 기입을 통해 발생한다.
투사: 외부 세계의 대상이 에고로 옮겨지고 보관되는 과정
기입(incorporation): 대상들이 육체의 표면에 보존되는 과정
-사라 살리, 김정경 옮김,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앨피, 2007, 99쪽.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