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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 13. 나는 너야(I am you)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별을 ‘살아내는’ 법] - 13. 나는 너야(I am you)

건방진방랑자 2021. 7. 2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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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너야(I am you)

 

 

루디: (길을 걷다가 ‘Free Hug’ 팻말을 든 젊은이가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본다)

젊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프리 허그! 공짜로 안아드립니다.

루디: 정말 공짜라고요?

젊은이: (웃으며) .

루디: (그래도 의심이 가지지 않은 듯 주춤주춤 서성거린다)

젊은이: (자신도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팔을 벌린다)

루디: (주춤주춤 다가가 젊은이에게 안긴다)

젊은이: (루디를 따뜻하게 안아 준다)

루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맙습니다.

 

 

평생 집과 직장만을 오갔던 모범 사원 루디,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부토를 함께 관람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던 루디, 춤이나 노래 같은 유희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루디. 그가 변하고 있다. 그는 부토 소녀 에게 춤을 배운 후부터 타인을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평생 러닝머신을 달리듯 똑같은 인생만 고집했던 루디에게 아내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세상인지도 모른다. ‘프리 허그라는 생소한 퍼포먼스에 불현듯 몸을 맡기는 루디의 입가에는 어색하지만 뿌듯한 미소가 스쳐간다.

 

단지 아름답게 흩날리는 벚꽃을 보기 위해 모여든 수천의 인파들, 그 속에서 마치 타고난 천직인 양 부토를 추고 있는 어린 소녀, ‘프리 허그가 자신의 소명인 듯 열심히 낯선 행인들을 안아주는 젊은이.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죽은 아내가 진정 보여주고 싶어 했던 다른 세상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것들,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들을 보며 루디는 매일 똑같이 살아온 자신의 삶이 다른 무늬로 재조립되는 것을 느낀다. 죽은 아내를 이해하는 길은 곧 이 세상 사람들, 나와 다른 타인들을 이해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루디: 넌 이름이 뭐니?

: (Yu)!

루디: (소녀가 you라고 말한 것으로 착각하고) 아니, 나 말고 너(you)말이야.

: 제 이름이 유(yu)에요! (‘I am yu!’라는 소녀의 문장은 관객에게 ‘I am you!’로 들린다.)

루디: 네가 나라고?(You are me?)

: 제 이름이 유라고요.

루디: , 그래?

: 할아버지는요?

루디: 루디!

: 루디? , . 루디! 기차가 와요. 어서 타세요!

 

 

소녀의 이름이 ‘you’라는 단어와 발음이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루디가 잘못 알아들은 문장, ‘I am you’야말로 이 영화 전체에 아련하게 깔린 복화술이기 때문이다. 루디는 생면부지의 소녀 (yu=you)’에게서 를 본다. 루디는 소녀를 처음 보지만, 죽은 엄마와 매일 통화한다는 이 소녀의 슬픔을 너무도 잘 안다. 죽음의 고통을 차라리 아름다운 춤으로 승화시킨 이 소녀에게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남들에게는 그저 춤으로 밥을 버는 걸인처럼 보이겠지만 그녀에겐 이 덧없는 춤이 엄마와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루디는 알아준다.

 

루디는 저 어린 소녀가 도대체 집도 절도 없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녀를 미행한 루디는 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유를 발견한다.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천막이지만 안팎을 깔끔하게 청소하는 소녀의 침착하고도 경건한 표정을 보자 마음이 시려온다. 루디는 이 소녀에게 묵을 곳을 마련해주고 싶다. 내 아픔을 진정으로 알아준 이 소녀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루디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소녀를 무작정 아들의 집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막내아들 칼은 강경하다. “집에선 저만의 공간이 필요해요! 저 나이에 거리로 나왔다면, 그건 자기가 선택한 거라고요.” 루디는 소녀가 아직 어린 아이라며 아들의 인정에 호소하지만 칼은 단호하다. “절 믿으세요. 저 아이가 선택한 삶이라고요!”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유는 말없이 떠난다.

 

루디는 아들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소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 한때 그의 눈에는 아내가 떠나버린 세상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폐허처럼 보였다. 그는 평생 해온 대로 각종 쓰레기를 재활용 등급에 따라 정확히 분류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삶에 남은 아내의 유품을 어떻게 분류하고 처리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소녀의 부토를 보며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는 저 소녀의 춤에 등장하는 저 코드 뽑힌 전화기처럼, 저렇게 연결될 수 있겠구나. 굳이 전화선에 연결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통화할 수 있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아득한 거리. 당신을 기억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는 한, 당신이 남긴 모든 흔적은 아름답게 재활용될 수 있겠구나. 이제야 알 거 같다. 모든 버려진 것들, 이제는 쓸모를 잃어버린 모든 유품들, 한 사람의 삶이 남기고 간 덧없는 잔해들이야말로 죽은 이의 흔적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아늑한 거처임을. 당신이 남긴 아주 작은 흔적조차도 당신의 부재가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내 작업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뉴욕에 온 이유는 이곳이 가장 황량하고 가망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깨진 것과 무질서가 보편화되어 있다. 당신은 그것을 보기 위해 눈만 뜨면 된다. 파멸된 사람들, 깨어진 것들, 파편화된 생각들. 도시 전체가 쓰레기더미다. 하지만 내게는 그곳이 최적의 장소다. 나는 거리를 끝없는 물질의 원천으로, 부서진 물건들의 끝없는 저장고로 발견했다. 매일 나는 종이봉투를 들고 옮겨 다녔고 연구할 가치 있는 대상들을 수집했다. 내가 발견한 물건들은 그 사이에 수백 가지로, 폭발한 것에서부터 터진 것, 조각이 난 것에서부터 쥐어짜진 것, 짓눌러 부서진 것에서 썩어빠진 것에 이르기까지 쌓였다. 그럼 당신은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실 건가요? 나는 그 물건들의 이름을 지어주지요. 이름을요? 나는 그 물건들에 딱 맞는 말들을 만들어내지요.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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