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1. 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내가 완결되고 사건이 완결되었다면, 나는 살 수 없으며 행동할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완결되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38쪽.
우리는 가족이나 연인, 절친이나 룸메이트처럼 가장 가까운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타인을 엿보며 끊임없이 탐색전을 펼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자신도 모르게 신경 쓰며 하루를 보낸다. 소설을 쓰는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관계,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주인공의 관계 또한 그렇다. 한 쪽은 끈질기게 엿보고 한 쪽은 좀처럼 자신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한 쪽은 ‘난 널 이해할 수 있어, 아니, 내가 널 만들었잖아!’라고 속삭이고 한 쪽은 ‘아니, 넌 날 결코 이해할 수 없어, 난 네 인식의 한계를 넘어 존재하지’라고 속삭인다.
영화 『의형제』를 바라보며 주인공을 바라보는 작가-감독의 시선의 위치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의 시선은 관객들에게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이 사람은 꼭 이렇게 이해해야 해’라고 강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장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조바심도, 깜짝 반전을 통해 관객을 쥐락펴락하려는 과욕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 『의형제』에서 감독의 시선은 ‘창조자’라기보다 ‘메신저’의 역할에 가깝게 보인다. ‘자, 봤지? 바로 내가 이 인물들을 만들어냈어!’가 아니라, ‘나는 그냥 이 인물들을 당신들의 곁에 데려다주는 데에 충실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듯한 조용한 메신저의 역할 말이다.
『의형제』의 광고 콘셉트만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또 간첩 이야기야?’하는 의구심부터 일었기 때문이다. 두 남자의 미묘한 심리전이라니, 게다가 ‘의리’를 강조하다니, 유난히 마초적 의리를 강조하는 영화가 활개를 치는 한국에서는 좀 식상하지 않은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광고 카피는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그런 소재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의형제』에서 이념적 갈등이나 블록버스터적 스케일이 아니라 ‘한 인간’을 바라보는 가장 아름다운 각도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져서 좋았다. ‘나는 그를 알지만, 당신들은 그를 잘 몰라’라고 말하는 듯한 위압적인 시선이 아니라 ‘나는 그를 알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그는 그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감독의 담담한 시선이 좋았다.
강동원이 연기한 송지원이라는 인물은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된 캐릭터가 아니라 마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끊임없이 흔들리는 관객의 마음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의형제』에서는 인물의 캐릭터가 처음부터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조금씩 배우와 감독의 교감을 통해 만들어져가고 있는 한 인물의 마음이 걸어온 아련한 흔적이 느껴졌다. 게다가 불세출의 배우 송강호는 그가 연기하는 이한규라는 인물이면서도 ‘아, 역시 송강호구나!’하는 감탄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반쯤은 배우이고 반쯤은 이미 감독이 된 듯한 내공을 보여준다. 그는 이한규라는 인물을 연기해내고도 마음의 여백이 한참 남아 ‘송지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으려면 내가 어디에 서면 될까’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한규가 선 자리는 과연 송지원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가장 가까운 인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진정한 얼굴, 온전한 얼굴을 보기 위해서 (……) 삶의 우연한 상황 때문에 그에게 씌워진 덮개들을 얼마나 많이 벗겨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라. 주인공의 견고하고도 명확한 형상을 얻기 위해 싸우는 예술가의 투쟁은 상당 정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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