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효경한글역주, 제10장 『여씨춘추』를 논함 - 치열한 편집의 결과물 본문

고전/효경

효경한글역주, 제10장 『여씨춘추』를 논함 - 치열한 편집의 결과물

건방진방랑자 2023. 4. 1. 02:14
728x90
반응형

 치열한 편집의 결과물

 

 

여씨춘추(呂氏春秋)의 편찬상황에 관한 사마천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의 기록을 한번 훑어보자!

 

 

이 시기에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 위나라 안리왕安釐王의 아우), ()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초나라의 귀족), ()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아우), ()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제선왕齊宣王의 이복동생 전영田嬰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천하의 선비들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았고 빈객(賓客) 좋아하기를 서로 경쟁하였다. 여불위(呂不韋)는 진나라가 강성하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 그 여타 나라와 같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었다. 그래서 또한 선비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을 후대하였는데 식객(食客)3천 명에 달하였다.

當是時, 魏有信陵君, 楚有春申君, 趙有平原君, 齊有孟嘗君, 皆下士喜賓客以相傾. 呂不韋以秦之彊, 羞不如, 亦招致士, 厚遇之, 至食客三千人.

 

이 시기에 제후국들에는 변론을 잘하는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순경(荀卿)순자를 일컫는다. 여씨춘추가 편찬될 당시 제나라 직하학파의 총장을 지낸 바 있는 순자는 생존해 있었다. 초나라 재상인 춘신군(春中君)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난릉(蘭陵)의 현령으로 있다가 춘신군이 죽자[BC 238] 관직을 물러난 뒤 계속 난릉에서 제자들을 키우고 저작에 몰두하였다. 아마 순자의 제자들(직하학파계열) 중 상당수가 여불위의 식객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의 무리들은 글을 지어 천하에 유포하였다순자계열의 사상가들이 여불위 집단에 많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是時諸侯多辯士, 如荀卿之徒, 著書布天下.

 

여불위(呂不韋)는 이에 자기에게 모여든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식견을 집필케 하였다. 이들의 논문을 모아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편집했는데, 모두 20여 만 언이나 되었다. 여불위(呂不韋)는 이로써 천지만물에 관한 고금(古今)의 일이 다 구비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이 책을 이름 지어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가 완성되자 그것을 함양(咸陽)의 성문에 진열해놓고 그 위에 천금을 놓았다. 그리고 제후국의 유사(游士)나 빈객(賓客) 중에 여기에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널리 포고하였다.

呂不韋乃使其客人人著所聞, 集論以爲八覽六論十二紀, 二十餘萬言. 以爲備天地萬物古今之事, 號曰呂氏春秋. 布鹹陽市門, 懸千金其上, 延諸侯遊士賓客, 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

 

 

이 기사로써 우리는 여씨춘추(呂氏春秋)편찬의 실제정황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 여씨춘추(呂氏春秋)는 한 사람의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라, 당시 중원 각국에 포진되어 있던 다양한 사상가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다.
2) 다양한 사상가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사상에 대한 존중이 있다.
3) 이들 사상가들에게 일정한 테마를 주고 각기 집필케 한 후에 따로따로 집필된 논문들을 한데 모아 편집한 것이다.
4) 편집의 체계가 치밀하여 한 글자의 가감도 있을 수 없다고 자랑할 정도의 전체 틀을 갖추었다.

 

이상의 정황은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텍스트의 실상과 그대로 부합된다. 십이기(十二紀)12권이며 각 권마다 5편씩 할당되어 총 60편이 있으나 마지막에 서의(序意)편이 삽입되어 61편이고, 팔람(八覽)8권이며 각 권마다 8편씩 할당되어 64편이 될 텐데, 서의(序意)편이 삽입되는 바람에 유시람(有始覽)에서 한 편을 감하여 63편이 되었고, 육론(六論)6권이며 각 권마다 6편씩 할당되어 36편이 되었다.

 

그러니까 전체가 26160편인데, 이 숫자에도 편집의도가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 각 편마다 대강의 균일한 분량이 정해져 있어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치열한 편집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상가들의 논의를 하나의 서물로서 결집시키는 어떤 특수한 체계를 갖춘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잡가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어떤 내면적 통일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용

목차

원문 / 呂氏春秋』 「孝行/ 五倫行實圖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