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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개비의 세계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 개비의 세계

건방진방랑자 2021. 5. 26.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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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비의 세계

 

 

우리 국악계에 통용되는 말로서 개비라는 말이 있다. 개비란 그 태생으로부터 국악인의 집안에서 큰 달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개비의 백퍼센트가 무속집안이다. 즉 개비는 모두 성인(𦔻人)’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실상 모두 사마천의 기술대로 빈()하고 천()한 사람들이다. 이 개비들의 큰 특징으로서 우리는 두 측면을 들 수가 있다. 그 첫째가 그들은 상례(喪禮, 시킴굿)의 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째가 곧 그들은 가무(歌舞)의 달인이며, 또 탁월한 악사들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시나위의 명인들이다. 시나위란 당골의 무용을 반주하기 위하여 고안된 계면길의 즉흥기악곡이다. 서로 다른 가락들이 동시에 연주되어 이루어가는 앙상블(ensemble)개념이 존재하는 유일한 음악이다. 보이지 않는 본청을 따라가는 자유로운 변주음악이다. 시나위는 곧 째즈다. 공자는 곧 째즈의 명인이요 달인이었던 것이다. 나의 이런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뜰 많은 학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산동(山東)의 고속(古俗)이 우리나라 백제문화권인 남도음악에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비근한 사례를 들어 공자와 논어를 이해할 때,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정확한 실상에 접근할 수도 있다.

 

남도 당골네를 따라다니는 악사들을 우리가 삼현육각(三絃六角)이라고 부르는데, 이 삼현육각이란 세 개의 현악기와 여섯 개의 뿔관악기(three strings and six horns)’란 의미와 전혀 관계가 없다. 삼현육각은 실제로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그려져 있듯이, 지금까지도 향피리 두 개, 젓대(대금) 하나, 해금 하나, 장고 하나, 북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육각이란 연주자의 숫자를 말하는 것으로 여섯 명의 총각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삼현이란 새면이라는 토속어의 와전으로 시나위와 같은 어원의 말일 것이다. 공자는 실제로 새면육각잽이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이 새면육각잽이야말로 시나 위의 명수들이며 째즈의 달인이며 상례(喪禮)주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의 예식의 달인이었다. 성인의 일차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죽음의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그 구체적 맥락을 잡아야 할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이 모두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주되는 것도 바로 공자가 이러한 째즈의 명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그 상황 상황에 예민한 탁월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논어가 말하는 예()의 핵심이 관혼상제(冠婚喪祭) 중에서도 바로 신종추원(愼終追遠)하는 상례(喪禮)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상례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는 사회질서의 근간이었고 그 예의 근간은 상례였다. 상례는 삶과 죽음의 교두보였기 때문에 가장 정중하고 가장 화려하게 치루어졌으며 음악과 춤의 전문성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고대문화의 핵이었다.

 

어린 공자는 니구산 자락에서 조두(俎豆, 제기)를 진()하고, 예용(禮容)을 설()하며, 가무와 악기와 굿의 달인으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늠름하게 자라났을 것이다. 공자가 자라난 니구산 자락에서 노성(魯城)까지는 약 22km, 한 육십 리 되는 거리다. 소년 공자가 죽으라고 열심히 걸으면 한나절(6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별하고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외로운 소년 공자가 가끔 곡부의 벌판을 열심히 횡단하는 모습을 연상해볼 수 있다. 외로운 소년 공자는 곡부 노성 내에 있는 외조부의 집을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외조부의 집에 도착했을 때, 호기심이 많은 시골 당골후보생인 소년 공자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것은 성내 지위 높은 자들의 상례를 치루는 장엄한 위용이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본격적인 상례, 시킴굿을 보고 공자는 끓어오르는 어떤 예술적 충동, 그리고 무한한 지적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장엄한 예식들이 모두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과연 어떤 근거 위에서 이러한 예식들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제사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호기심 많은 소년 공자의 가슴에는 이런 질문들이 끊임없이 끊어 올랐다. 그는 엄마에게 졸랐을 것이다. 더 이상 촌구석 산자락에서 살기 싫다고, 아들의 강렬한 배움의 욕구를 감지한 엄마 안징재는 공자의 소년시절 어느 시점에 용단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노성 내 한복판 곡부 궐리(闕里, 취에리, Que-li)에서 컸다. 그는 비록 천한 신분으로 컸지만 끊임없는 물음[多問]의 인간이었고, ‘박학다능(博學多能)’의 귀재였다.

 

나는 이 시점에서 공자에 관한 더 이상의 작은 이야기들[小說]을 써내려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논어라는 텍스트가 독자들에게 속삭여야만 할 부분이다. 공자의 삶의 이야기를 내가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다듬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약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에 관한 가능한 모든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개념적인 틀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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