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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2부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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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2부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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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부패한 외척ㆍ환관 정치에 호족들의 등쌀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영향으로 탐관오리들이 들끓게 되자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강력한 시황제의 진 제국도 진승과 오광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보다 훨씬 오래 존속한 한 제국의 말기도 비슷했다. 후한 중기부터 치솟던 농민들의 분노는 이윽고 184년에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이번의 농민 반란은 진승과 오광의 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선 중국 전역에서 36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농민이 일제히 봉기한 것은 규모로 보나 조직력에서 보나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노란 깃발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린 이 반란군은 장각(張角)을 우두머리로 삼고 치밀한 모의 끝에 거사한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황건 반란군은 정신적ㆍ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후한 중기부터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짐에 따라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는 황노 사상이 만연했다. 이것은 점차 황노 신앙으로 바뀌어 종교적인 색채를 강렬하게 띠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를 토대로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 교에 가입할 때 쌀 다섯 말을 바친 데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라는 종교 교단이 형성되었다(사회 엘리트 = 유가, 일반 민중 = 도가의 공식은 10세기 넘어서까지도 기본 구도였다).

 

당시 한의 정권은 외척이 잡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조직적이고 이념적이고 강력한 반란군을 맞아 외척 정권은 총력을 기울여 대항했다. 우두머리인 장각이 죽자 황건의 난의 주류는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나, 그 불길은 작은 불씨로 변해 오히려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지방 호족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원래 사병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던 데다, 황건의 난에 맞서기 위해 중앙정부는 지방 호족들의 군사 활동을 허락하고 장려한 터였다. 이제 비축된 힘을 가지고 실력 행사에 나설 때다.

 

호족들은 앞다투어 군비를 확장하고 자기 영지의 방어에 나섰다. 환경이 맞으면 방어는 쉽게 공세로 전환된다. 얼마 안 가 호족들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처럼 각자 나라를 세우고 독립국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호족들에게 자체 경비를 권장할 정도로 허약해진 중앙정부는 더 이상 통일 제국을 이끌어갈 힘이 없었다. 220년 후한 황실은 지방 호족 출신의 신흥 귀족인 위()나라의 문제(文帝)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나라를 넘기고 말았다. 이로써 최초의 통일 제국인 한은 410년의 사직(왕망 시대 제외)을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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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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