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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 8. 후한시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중국역사 - 8. 후한시대

건방진방랑자 2021. 12. 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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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후한 시대(後漢時代)

 

 

1. 혼란의 시작과 한나라를 장악한 왕망

 

 

호족의 대두

 

1. 향촌 사회는 자치 운영으로 유지되었으나, 화폐 경제의 유입으로 돈이 많은 호족이 등장함.

 

2. 농민들은 점점 빈곤해져 유랑민ㆍ도적이 되거나 대부분 호족의 농지를 소작하며 노비가 되기도 함.

 

3. 이와 같이 공동체 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빈농의 반란이 일어나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초래됨.

 

 

 

 

 

왕망의 명망과 관직 진출

 

1. 왕망(王莽)은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의 동생인 왕안(王晏)의 아들로, 원제가 죽고 어린 나이로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황후인 왕씨가 실권을 장악함.

 

2. 왕씨의 일족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에 가난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효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음.

 

3. 왕망은 왕봉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 뒤 여러 선비 사이에서 현자로 평판을 받아 38세의 나이로 재상인 대사마(大司馬)에 오름.

 

 

실권 장악

 

1. 성제(成帝)ㆍ애제(哀帝)가 거듭 요절하고 9살의 평제(平帝)가 뒤를 이어 즉위했고 왕망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점차 실권을 장악해 나감.

 

2. 왕망은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토지를 희사해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일로 자신을 칭송하는 자들을 늘려나감.

 

3. 중앙관리를 자신의 심복으로 배치하였고 자신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평제를 독살하고 두 살의 영을 후계자로 옹립함.

 

 

왕망의 섭정

 

1. 무공현 현령이 우물에서 왕망이 황제가 되리란 글이 새겨진 흰 돌을 발견하자, 왕망은 이를 이용하여 황제로 추대되려고 함.

 

2. 그러나 왕황태후가 반대하였기 때문에 주공의 예를 들며 섭정하였으며 복장도 황제와 똑같았기에 섭황제(攝皇帝)란 칭호로 불림.

 

3. 연호도 거섭(居攝)으로 바꿨으며 이때 3년 후 다시 산동성에서 섭황제는 진황제(眞皇帝)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나와 이러한 분위기를 타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신() 나라를 세움.

 

 

 

 

 

2. 왕망이 건국한 신나라 15년의 역사

 

 

왕망의 이상형인 주() 나라를 모방한 정책

 

1.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주나라의 관제를 설명한 유가 경전인 주례(周禮)에 의거해 모든 관제를 바꿈.

 

2. 토지 개혁을 위해 매매를 일체 허용하지 않고 토지를 국가가 거둬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려 함.

 

 

이상과 현실의 차이

 

1. 탁상공론적인 정책은 관료들의 부패로 시행되기가 어려워 토지 개혁은 3년 만에 폐지됨.

 

2. 노비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토지 문제의 방치와 가혹한 형벌로 범법자가 날로 늘어남으로 더욱 가중되기만 함.

 

3.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진 왕망의 개혁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으며 농민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며 멈춤.

 

 

반란의 시작

 

1. 산동 태산에서 낭야 출신 번숭(樊崇)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호복의 녹림산(綠林山)에서도 5만의 봉기군이 집결함.

 

2. 이들은 한왕조 부활을 기치로 내세우고 왕망의 죄상을 고발하는 한편 황족의 유현(劉玄)을 황제로 내세워 그를 경시제(更始帝)라 일컫고 완성(宛城)을 수도로 정하고 왕망 타도를 외침.

 

 

 

 

3. 왕망의 퇴출과 외효와 공손술의 섬멸하며 후한의 기틀을 잡은 유수

 

 

왕망 퇴출을 위한 남양봉기군

 

1. 유수(劉秀)의 형 유인(劉縯)은 왕망의 신()에 반대해 여러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모으기 시작함.

 

2. 군대를 통솔할 인물을 추대하려는 논의 가운데 유연의 명석함과 지나친 결단력을 두려워하여 유현을 경시장군으로, 유연을 대사도(大司徒), 유수를 장군으로 삼음(이후 유연은 경시제로서 황제의 자리에 오름).

 

3. 유수의 3천 명의 군대가 왕망의 40만 대군을 기습하여 성공하자 왕측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주변세력들이 왕망정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남.

 

4. 남양봉기군 내에서 유현이 유수의 형 유연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유수는 오히려 사죄하며 유유자적하자 유현도 곤양의 싸움에서 수훈을 세운 유수에 대해서 트집 잡을 일이 없었음. 그래서 유수를 파로장군(破虜將軍)에 임명하고 무신후(武信侯)에 봉함.

 

5. 남양봉기군은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왕망을 살해하고 장안을 함락시킴(건립 15년 만에 멸망함).

 

 

경시제(更始帝)의 씁쓸한 최후와 유수의 집권

 

1. 경시제는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으나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서 민심을 잃음.

 

2. 왕망 정권 타도에 앞장선 적미군은 유분자(劉盆子)를 천자로 추대하여 경시제를 죽이고 정권을 탈환했으나 오합지졸로 신망을 잃음.

 

3. 이때 유수는 하북 일대에 장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어서 25년에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바꿔 적미군을 진압하고 마지막 남은 반란군 농의 외효와 공순술을 섬멸함.

 

4. 낙양을 수도로 삼아 한 제국을 부흥시킴.

 

 

 

 

4. 광무제의 나라 정상화 작업

 

 

수도 낙양

 

1. 장안이 정미군에 의해 초토화되었고 남양 출신의 광무제에게는 낙양이 자신의 출신지보다 가까웠기 때문에 선정.

 

2. 광무제의 창업을 도운 개국 공신들도 대부분 남양 출신임.

 

3. 고조묘(高祖廟)를 세워 자신의 창업이 한왕조의 부흥이란 사실을 명백히 함.

 

 

정책과 공신회유책

 

1. 전한 때 시행된 1/30 () 제도를 부활시키고 군사제도를 소수 정예화하며 생산 활동을 극대화시킴.

 

2. 노인, 고아, 빈곤자들에 대해 구제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혼란스럽던 화폐제도를 개혁해야함.

 

3. 공신들에게 높은 지위를 줄 경우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기에 고조가 택한 토사구팽 정책을 버리고 공신들에게 서열에 해당하는 토지와 식읍을 하사하고 후한 상을 내려 그들의 공로와 무훈을 표창함.

 

4. 각자 봉지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되 정사에 참여하진 못하게 하여 정국을 서서히 안정되었다.

 

 

대외정책

 

1. 무력 위주의 정책을 지양하고 중원과 국내의 실정에 따라 회유책을 폄.

 

2. 변방의 이민족과 외국의 사신들이 줄을 이어 수도 낙양에 몰려 천자를 알현하고 알현의 축배를 들었음.

 

 

 

 

 

5. 후한 시대의 서역 정책과 서역을 평정한 반초의 이야기

 

 

반초(班超)

 

1.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저자인 반고(班固)의 동생으로, 학식이 풍부하며 흉노가 자주 변경에 침범하여 약탈을 하나 대비하고 있지 않단 소식에 격분하여 무장을 갖추어 원정군에 가담함.

 

2. 흉노 원정관인 두고(竇固)는 반초를 가사마(假司馬)로 삼고 선선국(鄯善國)으로 보내자, 그는 수행원 36명과 선선왕을 굴복시켜 굴복을 맹세케 함.

 

3. 우전과 소륵을 평정하고, 서역 남로의 제국을 모두 한의 세력권에 넣어 65년 동안 단절되었던 서역과의 교통을 부활시킴.

 

 

소극적인 서역 정책과 적극적인 서역 정책

 

1. 3대 장제(章帝)는 소극적인 서역 정책으로 반초에게 군사를 거두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2. 반초는 탄원서를 올리며 서역에 남아 서역을 평정했다.

 

3. 4대 화제(和帝)는 남흉노족과 결탁하여 북흉노족을 무찔렀으며 게르만 지역을 점령하여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일으킴.

 

 

의의

 

1. 서역에서 30년 간 활동하였는데, 장건 이후 중서간의 경제,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함.

 

2. 약소한 나라가 서로 단결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우호적인 여러 나라의 힘을 합쳐 흉노에 가까운 나라들을 장악함.

 

3. 서역과 한의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정치와 경제 관계가 회복됨.

 

 

 

 

6. 우허의 활약, 그리고 두태후와 양기(梁冀)의 횡포로 서서히 저무는 후한

 

 

외척 두태후(竇太后)의 섭정과 환관

 

1. 화제(和帝)10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두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됨.

 

2. 장성한 화제는 이러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인 환관 정중(鄭衆)에게 의지하게 됨.

 

3. 후한의 후반기는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정권을 농락하는 일이 계속됨.

 

 

양기(梁冀)의 횡포

 

1. 양기(梁冀)는 순제(順帝) 황후의 오빠로서, 자신의 누이가 순제의 황후가 되어 서서히 권력을 손에 쥠.

 

2. 그는 아버지를 집금오(執金吾), 자신을 그 아래 자리인 양읍후에 봉한 후 차츰 관직을 높여 대장군 자리를 승계함.

 

3. 3년 후 순제가 30세로 죽자 두 살의 황태자가 충제(忠帝)로 즉위함으로 양태후 섭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충제는 다음해에 죽음.

 

4. 양기는 태후와 상의하여 유찬(劉纘)을 질제(質帝)로 세웠는데 총명한 황제가 눈에 거슬린 양기는 독약을 타 절제를 독살함.

 

 

 

 

7. 2차에 걸쳐 일어난 당고(黨錮)의 화()

 

 

2차에 걸친 당고의 화

 

1. 양기의 부인인 손수(孫壽)는 남편의 권력과 동등할 정도로 위세를 부림.

 

2. 뇌물을 받고 죄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손수의 집에는 뇌물을 바치려는 행렬이 늘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함.

 

 

1차 당고(黨錮)의 화

 

1. 이런 혼란 가운데 양태후가 죽었으며 양기의 누이동생으로 환제(桓帝)의 황후였던 양씨도 세상을 떠남.

 

2. 환제는 이런 틈을 타 양씨 가족을 몰아내기로 함.

 

3. 환관 당형(唐衡)을 불러 몰아낼 계책을 물으며 모든 호위병들을 집결시켜 양씨 토벌 계획을 실행하여 성공시킴.

 

4. 그런 기쁨도 잠시 양씨 토벌에 공이 있는 다섯 환관이 열후의 자리에 올라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함.

 

5. 대학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자 환관들은 이에 상소를 올려 이를 정벌하게 함으로 환제는 환관들을 가두었으나 종신금고형만 내렸고 고향으로 돌려보냄.

 

 

2차 당고(黨錮)의 화

 

1. 그해 12월에 환제가 죽고 유굉이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영제(靈帝)인데 12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두태후가 섭정함.

 

2. 두태후는 태학생들을 임명하는 등 어진 정책을 폈으나 환관들의 전횡은 더욱 극심해짐.

 

3. 태학생인 진번과 두무는 태후와 의논하여 환관 주살 계획을 세웠으나 누설되어 태후는 남궁으로 쫓겨나고 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처벌당함.

 

 

극심한 전횡

 

1. 이때엔 벼슬을 돈으로 사야했기 때문에 관작을 얻은 자도, 그 돈을 메우기 위해 가혹한 수탈을 자행함.

 

2. 이런 관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하여 도적 집단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황건의 난이 일어남.

 

 

 

 

 

 

인용

개관

사기

목차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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