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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전쟁 아닌 전쟁(동인도회사, 아편전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전쟁 아닌 전쟁(동인도회사, 아편전쟁)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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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전쟁 아닌 전쟁

 

꾸준한 한화 정책은 청을 여느 한족 제국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만들었다. 한족의 선진 문화를 본받은 것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나쁜 점도 닮는다는 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성기 직후 곧바로 쇠락기가 시작되는 역대 한족 왕조의 운명이다.

 

너무 오래 통치한 탓일까?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일군 건륭제는 기나긴 재위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가 국정에 대한 관심을 놓으면 부패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북방 민족의 제국들은 한족 제국과 달리 환관 정치에 휘말리지 않았는데, 청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등잔 밑이 어두웠을 뿐이다. 우선 건륭제가 신임하고 국정을 맡긴 신하가 부정을 저질렀다. 이래저래 짜증이 난 건륭제는 1795년에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버렸다. 그의 나이 이미 여든네 살이었으므로 이해할 수 없는 양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황제가 누구냐가 아니라 전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점이다. 관리들은 각지에서 탐학을 일삼았고,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등쌀에 토지를 잃고 유랑민이 되기 일쑤였다. 정치가 실종되자 제국이 자랑하던 전통의 팔기군(八旗軍)도 무력해졌다. 오로지 군인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라는 뜻에서 녹봉에다 경비로 기지(旗地)라는 토지까지 받는 특혜를 누린 팔기군은 오랜 평화와 번영기를 거치며 군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타락했다. 할 일이 사라진 군인들은 쉽게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었다. 더구나 한인들이 만만하게 여기고 사기의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팔기군 병사들은 점차 생활이 궁핍해졌고 심지어 기지까지 팔아먹는 자도 있었다.

 

관리가 부패하고 백성이 곤궁해지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면 반란은 필연이다. 18세기 말부터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팔기군의 입장에서는 이제야 비로소 군인으로서 업무가 생긴 셈이었지만, 광에 처박아든 칼은 녹슬 대로 녹슬어 호미보다도 못했다. 강남의 구이저우와 윈난에서 일어난 묘족의 반란은 12년이나 걸려 겨우 진압되었고,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도 9년이나 걸렸다.

 

여기까지는 어느 왕조에서든 쇠락기에 나타나는 평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쯤에서 쿠데타가 성공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우는 거 정상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당시는 단순한 혼란기가 아니었고 예전의 어느 시기와도 달랐다. 바야흐로 수천 년 동안 독자적으로 발달해온 동양과 서양의 두 문명이 합하려는 시점이었다. 수십 년만 지나면 멸망할 것 같던 청의 수명을 그 뒤로도 100년 이상 연장해준 것은 오히려 동양으로 거세게 몰려온 유럽 열강이었다.

 

중국 역사로 치면 명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유럽 세계는 대항해와 탐험으로 발견의 문을 열었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정신 무장을 새로이 다졌다. 그리고 청대에 들면 유럽은 그간의 성과를 산업혁명이라는 결실로 맺었다. 15세기에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만 해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향료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동양으로 진출했으나 17세기부터 유럽의 패자로 떠오른 영국의 경우는 달랐다. 지난번에는 향료를 수입하기 위해 동양으로 왔지만, 이번에는 산업혁명으로 국내에 넘쳐나게 된 공산물을 수출하기 위해 시장을 찾아온 것이다.

 

수입과 수출의 차이는 크다. 수입을 꾀한다면 상인들 간의 무역으로도 충분하지만, 수출이라면 민간 부문의 힘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 서양은 동양에 식민지를 개척하더라도 그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어갈 힘은 없었다. 단지 산발적으로 향료와 금, 은 등을 수입하거나 약탈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침탈지를 황폐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기존의 사회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 서구 열강은 자국의 공업 제품을 팔고 자국 산업을 위한 원

료와 식량을 가져갔으므로 해외 식민지의 사회경제구조를 자본주의의 종속체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서구 열강의 경제적 침략은 식민지를 일회적으로 약탈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이고 영구적인 수탈을 구조화하는 강력한 위협이었다.

 

 

외국인 인형 17세기에 중국에서 제작된 서양인의 인형이다. 명대에 중국인이 보는 서양인은 거의 선교사들이었으나 청대에 이르면 이런 모습의 서양 상인들이 중국으로 많이 왔다. 청대 중기까지만 해도 유럽과의 무역이 정책격으로 장려되었지만, 사회가 안정되면서 대의를 향한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최초로 동양에 자본주의적 침략을 개시한 영국은 선두 주자의 벌금을 톡톡히 물어야 했다. 원래 영국은 명대 말기인 17세기부터 중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중국과의 무역을 시작했다. 조건은 몹시 나빴다. 중국은 광둥의 광저우 한 곳만 영국에 개방했고, 공행(公行)이라는 상인 조합 한 곳을 지정해 영국 무역을 전담하게 했다. 중국은 다분히 감합 무역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항구와 상인 조합을 한 곳만 개방한 것은 감합을 발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역을 하려는 자세라기보다는 형식적인 교류에 불과했다(광저우의 영국 상인들에게 예의범절까지 요구한 것은 당시 중국이 대외 무역을 어떻게 여겼는지 잘 말해준다).

 

그래도 무역에서 이득을 보았다면 영국으로서는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무역 초기에 영국은 예기치 않게 수입 역조 현상을 겪었다. 영국은 인도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영국산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 기타 보석이나 시계 등 잡화를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으로부터는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그런데 영국의 주력 상품인 모직물은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면직물을 주로 입는 중국인들은 모직물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서민들은 면직물을 쓰면 되고 귀족들이야 비단이 있잖은가? 게다가 광둥은 기후가 온화해 모직물은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4억 명에 달하는 중국 인구에 큰 기대를 품은 영국은 기대만큼 크게 실망했다. 문제는 수출만이 아니었다. 예상치 않게 수입이 크게 늘었다. 주범은 차였다. 차의 수입량이 늘면서 무역 역조는 더욱 심각해졌다. 18세기 말이 되자 수출 대금으로 받는 은보다 수입 대금으로 주는 은이 더 많았다. 이러다가는 국내산 은은 물론이고 멀리 멕시코에서 캐낸 은조차 중국으로 흘러갈 판이었다.

 

 

아편으로 타개한 무역 역조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본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해 무역 적자를 타개하기로 했다. 왼쪽은 인도의 아편 창고이고, 오른쪽은 아편을 중국에 실어 날랐던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에는 신사의 나라라는 게 없다.

 

 

이때 동인도회사는 묘수를 생각해냈다. 수출품을 바꾸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잘 먹히는 것으로, 회사는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로 했다. 아편은 마약이므로 약용 외에는 당연히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나 물불 가릴 것 없는 동인도회사는 밀무역을 통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편은 무역 역조를 타개하는 주력 상품이 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마약 수출국이라면 국제적 왕따를 당해야 마땅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도덕, 그것도 국제적 도덕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영국으로서는 애써 팔아도 팔리지 않는 모직물과 달리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는 신상품 아편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중대한 사회문제였다. 아편 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1820년대에 들어 드디어 무역 역조가 해소되었다. 은의 흐름은 중국에서 영국으로 바뀌었다. 이제 비상이 걸린 것은 중국이었다아편의 수입은 옹정제 시절부터 도덕과 미풍양속, 국민의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명대 중기 이후부터 급격히 늘어난 사무역, 곧 밀무역은 단속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미 중국인들의 상당수가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다. 청 정부는 아편이 백성들의 심신을 갉아먹을 때는 미지근하게 대처하다가 은의 흐름이 역전되자 적극적인 단속에 나선 것이다. 대책을 논의하던 청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이금론은 밀무역 자체에 문제가 있으므로 일단 아편 수입을 공식화하고(약재니까!), 지불은 대신 중국산 상품으로 하며, 민간에게는 아편 사용을 용인하되 관리나 군인에게는 금지하자는 주장이었다. 그에 비해 엄금론은 말 그대로 아편 수입을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결국 엄금론이 채택되었다. 원칙적으로 보면 당연히 엄금론이어야겠지만 그 주장을 실천하려면 힘이 필요했다(어떤 의미에서는 이금론이 당시의 실정에 맞는 현실적인 조치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조정은 즉각 실행에 옮겼다. 1839년 조정에서 파견된 임칙서(林則徐)는 영국 상인들에게서 2만 상자의 아편을 압류해 군중 앞에서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영국 상인들에게 마카오로 철수하라고 명했다. 이제는 전쟁이다! ‘신사의 나라영국은 즉각 무력 도발로 대응했고, ‘양반의 나라중국은 통상 중지와 선전포고로 대응했다. 신경질적인 유럽 챔피언과 점잖은 동양 챔피언,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두 챔피언의 실력이었다.

 

영국 의회는 원정군의 파견을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불과 아홉 표 차이로 전쟁이 결정되었다. 의회의 자유주의 세력과 지식인들이 도덕적인 취지에서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표 차이가 적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이 얕볼 수 없는 강적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아편굴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청 조정에서는 아편 흡음자가 늘어나는 것을 커다란 사회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더 골치 아픈 것은 중국의 상인과 관리까지 아편 밀수로 이득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영국이 아편 수출에 힘썼다 해도 중국이 부패하지 않았다면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1840년에 아편전쟁이 터졌다. 실은 전쟁이랄 것도 없었다. 인도에 주둔한 극동 함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 원정군은 순식간에 황해를 남북으로 누비며 광둥에서 톈진까지 중국의 동해안 전체를 휩쓸었다. 해전만이 아니라 몇 차례 맞붙은 육전에서도 영국군은 연전연승했다. 중국과 영국은 금세 진실을 깨달았다. 영국을 비롯해 서구 열강이 잠자는 용처럼 은근히 두려워한 중국은 실상 이빨 빠진 공룡에 불과했다.

 

1842년 청의 항복으로 영국과 중국은 동서양 최초의 조약이자 세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 조약을 맺었다청과 러시아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국경을 확정하는 정도였고 역사적 의미는 크지 않았다. 그때까지 중국은 역사상 어느 나라와도 조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조약이란 대등한 두 나라가 맺는 것인데, 중국과 대등한 나라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주변국의 왕을 중국이 책봉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에 비해 유럽은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국제 질서를 관장하는 역할을 잃은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국제전을 벌이고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약의 내용은 황당할 정도였다. 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홍콩은 이때부터 150년이 지난 199771일에야 중국에 반환되었다), 다섯 항구를 개항하며, 영국과 평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영국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전쟁의 원인인 아편 밀수 문제는 누락되었으며, 싸움을 건 것은 영국인데도 청이 2100만 달러의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관세 결정권을 영국이 가지기로 한 점이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조약과 관세의 개념이 없었던 당시 청 조정에서는 서양 오랑캐와 국제조약이라는 평등한 관계’(사실은 불평등 관계였지만)를 수립해야 한다는 굴욕감에만 몸을 떨었다.

 

 

서양의 화력에 무너지는 중국 아편전쟁은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 앞에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번영과 태평성대를 누렸던 중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림은 영국의 함포 사격으로 처참하게 침몰하는 중국 군함의 모습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전쟁 아닌 전쟁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

자구책

자구책

마지막 황제 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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