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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제3세계’의 변화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6부 열매① - 4장 변혁의 18세기, ‘제3세계’의 변화

건방진방랑자 2022. 1. 10.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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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세계의 변화

 

 

7년 전쟁은 불과 몇 년 전에 끝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완결지은 것이지만 그 전쟁과는 디른 측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참가 선수가 늘어났다는 것,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중세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의 역사에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15세기 말 모스크바 공국이 정치적·종교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이후(1457~458쪽 참조) 러시아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과 관계(주로 전쟁)를 맺었을 뿐 서유럽의 국제 질서에 뛰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러시아는 서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먼저 중앙집권과 근대 국가 체제를 이루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모델로 삼았으니 중앙집권이야 원래부터 당연한 것이었고, 서유럽의 프랑스가 위그노 전쟁에 휘말려 있던 16세기 후반 이반 4(Ivan IV, 1530~1584, 재위 1533~1584) 치하에서는 젬스키 소보르(zemsky sobor, 전국 회의)라는 신분제 의회도 생겨났다. 이반 4세는 그 밖에도 법전을 편찬했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제도도 완비했으며, 군제와 교회도 개혁해 일개 모스크바 공국을 일약 러시아 제국으로 격상시켰다(러시아 제국을 공식 국호로 삼게 되는 것은 1721년의 일이지만 골조는 이때 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봉건 귀족러시아의 봉건 귀족들 가운데 차르에게 복속된 세력을 보야르(boyar)라고 부른다. 주로 대지주인 보야르는 신분상의 귀족이라기보다 넓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원래 이들은 러시아의 각 공국에서 자체로 의회를 구성해 대공(군주)을 보좌했으나 러시아 제국이 성립한 뒤에는 차르의 임명을 받고 차르 자문 기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보야르는 정치와 행정에도 진출해 관료층을 담당했다들을 대규모로 처형하는 공포정치로 뇌제(雷帝)’라는 무시무시한 별명도 얻었다. 하긴, 그로서도 넓은 지역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귀족들의 영지를 강력한 제국 체제로 묶으려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반은 러시아 제국의 원형만이 아니라 향후 500년간 지속될 러시아 대내외 정책의 골간도 만들었다. 첫째, 대내적으로는 공포정치를 아예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그는 봉건 귀족들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비밀경찰까지 조직하면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에 힘썼다. 이 비밀경찰과 더불어 러시아 특유의 전제정치인 차리즘(tsarism)이 시작된다. 둘째, 대외적으로는 팽창정책을 펼쳤다. 이반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옛 몽골 지배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멀리 시베리아까지 러시아의 세력권을 넓혔다. 하지만 서쪽으로는 발트 해로 진출하려다가 스웨덴과 폴란드의 방어망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이런 이반의 팽창정책은 이후에도 계속 러시아의 대외 정책으로 자리 잡아, 동쪽에서는 꾸준히 팽창하고 서쪽에서는 계속 발트 해 진출에 실패하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된다.

 

 

뇌제의 성당 강력한 전제정치로 차리즘의 초석을 다진 이반 4세는 후진국 러시아를 적어도 영토적으로는 유럽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 사진은 그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성 바실리 대성당이다. 아홉 개의 원통형 예배당을 짜 맞춘 형태로 건축되었으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면 볼 수 있다.

 

 

대내적인 전제정치와 대외적인 팽창정책 이외에 이반이 러시아에 남긴 마지막 선물은 로마노프(Romanov) 왕조였다. 강력한 전제군주인 이반이 죽자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한동안 혼란이 이어지다가 1613년 젬스키 소보르에서는 이반의 황후 아나스타샤의 가문 사람인 미하일 로마노프를 황제로 선출했는데,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이다. 이반이 초안을 잡은 대내외 정책과 로마노프 왕조는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러시아 역사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서유럽 세계에서 벌어진 7년 전쟁에 개입할 만큼 러시아를 발전시킨 인물은 표트르 1(Pyotr I, 1672~1725, 재위 1682~1725). 흔히 표트르 대제라고 불리는 그는 그 존칭에 걸맞게 키도 2미터가 넘었으며, 서유럽에 비해 크게 뒤처진 러시아를 근대화시키고 전통적인 팽창정책을 충실히 계승한 뛰어난 군주였다. 동쪽으로는 시베리아를 넘어 1689년에 중국의 강국인 청 제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을 확정했고서유럽이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 러시아는 동쪽으로 팽창하면서도 부동항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남쪽으로 진출할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유럽 동남부 지역에는 당대 최강국인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고, 그 동쪽은 험준한 파미르 고원이었다. 할 수 없이 동진을 계속한 러시아는 청 제국의 북변에 이르렀는데, 청 역시 오스만에 못지않은 강국이었으니 러시아로서는 불운의 연속이었다(불운이라기보다는 후발 주자의 숙명이겠지만).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는 양국 간의 소규모 군사적 충돌이 잦았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이 분쟁을 해결한 것으로, 중국으로서는 유럽 국가와 최초로 맺은 국제조약이다, 서쪽으로는 1713년에 새 수도 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으로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유럽 무대에 진출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태웠다.

 

서유럽의 역사에 동참하려면 먼저 스웨덴을 꺾어야 한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스웨덴은 발트 해를 앞마당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스웨덴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나라는 러시아만이 아니라 덴마크와 폴란드도 있었다. 그래서 표트르는 그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 도전장을 던졌는데, 1700년부터 약 20년간 벌어진 이 전쟁을 북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시 폴란드의 왕은 작센 선제후였으므로 이 전쟁에는 작센과 프로이센, 하노버 등 독일 지역의 여러 공국도 개입했다. 그 무렵 서유럽에서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었으니 유럽 전역이 남과 북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셈이다.

 

스웨덴 왕 카를 12세는 덴마크와 폴란드까지는 어렵지 않게 제압했으나, 러시아는 다른 상대였다. 1707년 카를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했는데,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에 말려 참패하고 말았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은 중요한 계기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18세기 초반 스웨덴의 공세를 차단한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은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쳤으며, 20세기 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군의 침략을 막아냈다. 여기서 역전의 계기를 잡은 러시아는 1709년 스웨덴을 격파하고 발트 해의 제해권을 확보한 다음 스웨덴의 카를이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스웨덴을 압박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1721년 스웨덴과 러시아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결과 러시아는 스웨덴을 제치고 북방의 패자가 되었다. 표트르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러시아 역사는 유럽 역사의 일부분으로 당당히 편입되었다. 수십 년 뒤에 벌어진 7년 전쟁은 러시아의 유럽 무대 데뷔전인 셈이다.

 

7년 건쟁에서 프로이센에 병 주고 약 준 표트르 3세는 겨우 6개월간 제위에 있다가 쿠데타로 실각하고 곧바로 암살되었다. 조상인 표트르 대제의 서구적 취향을 넘어 표트르 3세는 자기 나라를 저주받은 나라라고 경멸하면서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2세를 숭배했으니, 귀족들의 반발을 산 것도 당연했다. 그의 죽음은 그가 저주한 조국에 두 가지 큰 선물을 남겼다. 하나는 러시아 발전의 걸림돌인 그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인 예카테리나 2(Ekaterina II, 1729~1796, 재위 1762~1796)가 제위를 이었다는 사실이다(그녀는 남편이 이혼할 음모를 꾸몄다고 여기고, 귀족들과 연합해 남편을 제위에서 몰아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이 숭배한 프로이센 출신이었으나 남편의 성향과 달리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었다. 심지어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프랑스 복식을 입었으니 표트르 대제보다 한술 더 뜨는 유럽 지향적인 군주였다. 물론 좋은 것도 모방했다. 그녀는 당대 서유럽의 뛰어난 군주들처럼 계몽 군주로 자처하면서 프랑스 계몽주의를 폭넓게 수용하고 디드로, 달랑베르, 볼테르 등과 교류했다. 그러나 1773년 흑해 연안의 농노들이 푸가초프를 지도자로 삼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예카테리나는 그것을 가혹하게 진압하고 전제정치의 고삐를 더욱 강화했으니 완전한 계몽 군주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표트르가 발동시킨 러시아 근대화(서구화)와 팽창정책을 계속 추진한 덕분에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제의 영예를 얻었다. 밝음 뒤에는 어둠이 있는 법, 그녀가 당대를 넘어 후대에까지 칭송을 받게 된 데는 지구상에서 한 나라가 사라진 덕분이 컸다.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고 계몽주의 철학을 정치에 도입하려 한 계몽 군주라면 당시 또 한 명이 있었다. 바로 프로이센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였다. 여러모로 죽이 잘 맞는 여제와 대왕은 1772년 두 나라 사이에 있는 한 나라의 영토에 욕심을 품었다.

 

바로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슬라브족의 국가이면서도 일찍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고(125~126쪽 참조) 서유럽 문명에 더 가까운 묘한 나라였다. 마침 프로이센과 지역적 경쟁자인 작센은 북방전쟁에서 타격을 입었고 7년 전쟁에서 다시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 힘이 크게 약화되어 폴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다. 이 기회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는 아직까지 국왕도 선거로 뽑는 정치적 후진국인 폴란드(그렇기 때문에 작센의 제후가 폴란드 왕을 겸하는 게 가능했다)를 나누어 먹기로 했다. 여기에 영토 상실로 심상해 있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끌어들여 세 나라는 폴란드의 분할을 강행했다생살을 뜯기는 사태가 일어나고서야 폴란드의 지배 귀족들은 정신을 차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폴란드는 1793년에 2차 분할되고, 1795년에는 3차 분할이 이루어져 나라 자체가 없어진다. 이후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위해 여러 차례 투쟁했으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은 100년도 훨씬 더 지나 20세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폴란드의 수난은 끊이지 않아, 2차 세계대전에서 잠시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었다가 전후에 다시 나라를 수복했다. 강대국들 사이에 낀 약소국의 운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게 영토 국가의 개념은 유럽 모든 나라의 지배자들에게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영웅과 여걸 왼쪽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이고, 오른쪽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행차하는 장면이다. 후대에 대왕과 여제로 불린 두 사람은 서유럽의 계몽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각자 자국의 국력을 크게 배양했다. 그들은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사이에 있는 폴란드를 사이좋게 분할하기도 했으니, 만약 둘이 결혼이라도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제국의 꿈

추락하는 프랑스

떠오르는 프로이센

3세계의 변화

집안의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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