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속의 쇠락
예전까지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건국 초기 수십 년에 불과했고, 100년을 넘겨 번영한 나라는 당 제국이 유일했다. 그에 비해 청은 사직도 여느 왕조에 못지않았고 번영을 누린 시기도 당보다 좀 더 길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어느새 근대의 문턱에 들어왔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제 중국 자체보다 동북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정세였다.
일단 대내적으로 청은 번영을 누릴 만한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조치 덕분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712년부터 백성들은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인두세를 추가로 물지 않았다. 장기간의 번영으로 가뜩이나 불어나는 추세에 있던 중국의 인구는 그것을 계기로 봇물 터진 듯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1700년에 2000만 명이던 인구는 50년 뒤에는 1억 8000만 명(여기에는 정복지의 인구도 포함되었다)으로 늘었고, 1800년에는 3억 명, 1850년에는 4억 명을 상회했다. 이 무렵에는 인구 증가가 제국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대두되었다.
그 많은 인구가 먹고살 수 있었던 것은 농업과 산업 생산량이 크게 증대한 덕분이었다. 청대의 농업은 뚜렷한 생산 기술상의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노동 집약적 농경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농업에는 인구 증가가 약이 된 반면 수공업에는 독이 되었다. 명대에 이어 청대의 수공업도 크게 발달했고, 부유한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들 중에서는 일부 근대적 자본가라 할 만한 계층도 생겨났다. 그러나 더 이상의 근대화는 없었다. 그 이유는 인구가 증가한 덕분에 어디서나 쉽게 값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에서는 노동력이 귀해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력까지 착취했고 노동시간의 감축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각종 산업 기계가 연이어 발명되어 자본주의가 만개할 수 있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청에서는 발명을 낳아줄 어머니가 없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가 농업 생산력에 도움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자 중국은 맬서스의 인구 법칙이 정확히 들어맞는 사례가 되어버린다. 식랑은 더하기로 증대하는 데 비해 인구는 곱하기로 증가하는 것이다. 빈민이 늘어나고 각지에서 탐관오리들이 판을 쳤다. 게다가 건륭제 말기에 정치와 행정이 다소 느슨해지면서 무력의 근간을 이루던 팔기제가 약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백 년 전 이민족 왕조인 원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던 한족 전통의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 세력도 활동을 재개했다.
여느 왕조에 비해 늦게 찾아오긴 했으나 드디어 청에도 말기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놓아두었다면 청은 결국 자멸하고 다른 왕조(한족 왕조)로 교체되었을까? 아니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새삼 각오를 다지고 중흥을 꿈꾸었을까? 시대가 평온했다면 둘 중 하나의 방향이었을 게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사의 용어로는 제국주의)의 물결이 중국을 향해 휘몰아쳐오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 물결은 여느 시대처럼 단순한 왕조 교체 이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중국, 아니 동양 전체에 요구하고 있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