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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조공인가, 무역인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조공인가, 무역인가

건방진방랑자 2021. 6. 8.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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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공인가, 무역인가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이론과 현실에서 완성된 것은 송대의 일이었으나 물리력이 약한 송은 중화사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이상으로만 간직했다. 그러다 결국 오랑캐인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런데 100여 년 뒤 한족의 명 제국이 복귀했다. 송대에 지금은 비록 오랑캐 세상이지만 한족이 다시 중심이 되리라던 주희(朱熹)의 이론이 사실로 증명된 걸까?

 

한족 왕조 명은 그 점을 의식했는지 개국 초부터 적극적으로 중화적 세계관을 주변에 강요했다. 영락제 시대 정화의 남해 원정도 그 작업의 일환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화의 원정은 유럽이 본격적인 대항해시대를 여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으므로 충실하게 진행되었더라면 이후 중국사, 아니 세계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17~18세기에 동남아시아 일대가 유럽 열강에 침탈당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은 활발한 대외 무역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가 오랜 곳에서는 민간 주도를 기본으로 하는 무역이 활성화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거니와 당시는 대외 무역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바로 왜구 때문이었다. 원대부터 중국과 한반도 인근 해상을 무대로 활동하던 왜구는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이따금 해안 지방의 주민들과 무역을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더구나 명 초기에는 해안 지방의 주민들까지 왜구에 가세했으므로 피해가 더욱 가중되었다. 그래서 주원장(朱元璋)1371년에 해안 주민들에게 일체의 사무역(私貿易)과 해외 출항을 금지하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지리적 위치상 중국보다 왜구의 피해가 더 심했던 조선에서는 초기에 회유책으로 삼포를 개항하기도 하고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무력으로 토벌하기도 했다. 당시 쓰시마는 일본 열도와 무관한 독립국이나 다름없었고, 왜구도 일본 본토인과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조선 정부는 나중에 극약 처방으로, 아예 연안의 섬과 해안 지방을 비워버리는 공도(空島) 정책을 폈다. 그래서 왜구가 근절될 때까지 한동안 한반도 주변의 섬들은 거의 무인도가 되다시피 했는데, 오늘날 독도의 소유권 문제가 복잡해진 데는 이 공도 정책도 한몫했다. 송과 원을 거치면서 활발해졌던 민간의 대외 무역은 이 해금령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사무역이 금지되었으니 남은 것은 국가의 공식적인 무역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 공식적인 무역일 뿐 정상적인 무역은 아니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에 투철한 명 정부는 국가 간의 무역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원래 국제 무역이란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는 국가들 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중화사상으로 보면 천하의 중심인 중국과 대등한 국가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명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나라만을 대상으로 무역을 허가했다. 이것이 조공 무역이다.

 

 

청 제국의 조공무역 왕의 행차를 보는 것 같은 거창한 행렬이다. 법란서 사절이다. 법란서는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오란다 사절, 즉 네덜란드 사절이다. 대서양 사절단으로서 서양의 여러 나라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 사절단이다.

 

 

조공 무역의 골자는 (, 공물)이 있으면 사(, 하사품)가 있다.”라는 것이었다. 즉 주변국 입장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하사하듯이 조공의 대가를 내주는 것이다. 명 정부는 이 조공 무역만을 정상적인 무역으로 간주했으며, 그 이외의 모든 무역 관계는 사무역, 즉 밀무역으로 규정하고 해금령으로 다스렸다. 주변국이 중국의 종주권을 무시할 경우 조공 무역조차 중지되었다이런 무역 방식은 조선도 그대로 답습했다. 중국을 본떠 조선은 주변국인 일본이나 여진에 대해 조공을 바치면 그 대가를 하사한다는 식으로 무역에 임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첫째, 조선은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였으므로 그 자신도 조공을 바치는 위치였다. 둘째, 조선의 생각과 달리 일본과 여진은 조선을 상국으로 받들지 않았다. 셋째, (중국)로는 바치고 아래(일본, 여진)로는 베푸는 조선의 무역은 만성 적자에 시달렸다.

 

이렇게 성격 자체가 비정상적이었으니 당연히 무역의 절차도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우선 명 정부는 조공 무역을 원하는 나라에 일종의 징표로 감합(勘合)을 발부했다. 중국에 조공 무역을 하기 위해 오는 무역선은 배 한 척마다 한 장씩 감합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감합만 가지고 와서는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천자의 서신을 받았으니 의당 답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역선은 자기 나라 왕이 명의 황제에게 보내는 답신을 가지고 와야 했는데, 이것을 표문(表文)이라 불렀다. 발부하는 감합의 양도 중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명의 국력이 강할 무렵에는 이 조공 무역도 그런대로 무역의 구실을 했다. 그러나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중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국력이 약화되고 조공 무역이 유명무실해지자 밀무역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은납제(銀納制)를 가능케 한 멕시코 은의 공급도 처음에는 이 밀무역으로 충당한 것이었다. 17세기 초반부터 중국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유럽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비단과 면직물, 도자기, 차 등을 수입하고 은으로 지불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그 덕분에 명의 은 가뭄이 해갈되었다. 재정난에 처한 정부를 살린 것은 밀수였던 셈이다.

 

 

마카오의 기원 1522년 명 조정은 외국 상인들을 모조리 내쫓았다. 그러자 외국 상인들은 사무역, 곧 밀무역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림은 광저우에 최초로 상륙한 포르투갈인들이다. 처음 정착한 곳이 광저우였던 탓에 19세기 열강의 중국 침략기에도 포르투갈은 광저우 부근의 마카오를 조차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 속의 유럽 도시인 마카오의 기원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황제가 된 거지

영락제의 세계화

환관의 전성시대

사람 잡는 은납제

조공인가, 무역인가

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

우물 안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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