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아닌 전쟁④
이리하여 1840년에 아편전쟁이 터졌다. 실은 전쟁이랄 것도 없었다. 인도에 주둔한 극동 함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 원정군은 순식간에 황해를 남북으로 누비며 광둥에서 톈진까지 중국의 동해안 전체를 휩쓸었다. 해전만이 아니라 몇 차례 맞붙은 육전에서도 영국군은 연전연승했다. 중국과 영국은 금세 진실을 깨달았다. 영국을 비롯해 서구 열강이 잠자는 용처럼 은근히 두려워한 중국은 실상 이빨 빠진 공룡에 불과했다.
1842년 청의 항복으로 영국과 중국은 동서양 최초의 조약이자 세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 조약을 맺었다【청과 러시아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국경을 확정하는 정도였고 역사적 의미는 크지 않았다. 그때까지 중국은 역사상 어느 나라와도 조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조약이란 대등한 두 나라가 맺는 것인데, 중국과 대등한 나라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주변국의 왕을 중국이 책봉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에 비해 유럽은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국제 질서를 관장하는 역할을 잃은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국제전을 벌이고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약의 내용은 황당할 정도였다. 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홍콩은 이때부터 150년이 지난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되었다), 다섯 항구를 개항하며, 영국과 평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영국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전쟁의 원인인 아편 밀수 문제는 누락되었으며, 싸움을 건 것은 영국인데도 청이 2100만 달러의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관세 결정권을 영국이 가지기로 한 점이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조약과 관세의 개념이 없었던 당시 청 조정에서는 서양 오랑캐와 국제조약이라는 ‘평등한 관계’(사실은 불평등 관계였지만)를 수립해야 한다는 굴욕감에만 몸을 떨었다.
▲ 서양의 화력에 무너지는 중국 아편전쟁은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 앞에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번영과 태평성대를 누렸던 중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림은 영국의 함포 사격으로 처참하게 침몰하는 중국 군함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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