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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험난한 공화정(북양군벌, 총통제, 위안스카이 독재)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험난한 공화정(북양군벌, 총통제, 위안스카이 독재)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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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새 나라로 가는 길

 

 

험난한 공화정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19세기 이후 100여 년이나 중국의 근대화가 질척거린 것은 외세의 침략이라는 바깥 요인 때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의 무능과 부패에도 큰 책임이 있었다. 더욱이 외세야 중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혁이 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공화정을 택한 것은 필연이자 올바른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길 역시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서구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무려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도 700년의 역사에 이른다. 근대 서구 공화정만 해도 수백 년 동안 중세와 절대주의를 거쳐 완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혁명과 전쟁을 치렀다. 과연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였다. 아무리 모방이라는 후발 주자의 이점이 있다. 해도 이 장구한 발전 과정을 단기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생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앞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선통제가 퇴위한 바로 다음 날부터 문제가 터졌다.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기로 하고 베이징에 있는 그에게 빨리 난징으로 와서 취임하라고 통보했다.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으니 당연한 요구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난징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세력권인 베이징을 떠나고 싶지도 않고 대총통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교활한 꾀를 냈다. 베이징에서 취임하면 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구실이 필요하다. 그는 부하를 사주해 베이징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고, 사고 수습을 핑계로 베이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초장부터 어그러진 약속이 이후에 지켜질 리 없다. 애초부터 민주주의나 공화정에는 관심이 없던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제국이 무너진 틈을 타 자신의 독재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내심 바라는 것은 총통 따위가 아니라 황제였다당시 위안스카이는 의회 정치의 관념에 익숙지 않았으므로 공화정과 제정의 차이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는 대총통이 공화국의 수장이니까 황제처럼 전제권력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다만 대총통은 황제와 달리 임기가 있고 세습되지 않는다는 정도만 알았는데, 그에게는 바로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는 그저 청 제국을 자신의 제국으로 대체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역사의 갈림길에 선 두 인물 쑨원(위)과 위안스카이(아래)는 우리 현대사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쑨원은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그때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 반면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공화정 체제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고 기회만 있으면 독재나 제정 복고를 꾀했다. 결국 쑨원은 중국의 민족 지도자로 역사에 남았고, 위안스카이는 반동적 독재자로 남았다.

 

 

그래도 공화정이니까 내각과 정당까지는 갖추었는데, 껍데기일 뿐 내실은 없었다. 제대로 하려면 공화정을 담당할 정치 세력이 필요하지만, 중국 자체의 역사에서 탄생한 체제가 아니었기에 그 정치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청일전쟁 이후 꾸준히 세력을 키우면서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군벌과 관료 출신, 자칭 개혁가 등 어중이 떠중이가 그 역할을 자임하고 앞다투어 정당을 조직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당들은 이내 합종연횡을 이루었다. 상당수는 여당인 공화당을 결성하고 위안스카이의 지지 세력이 되었으며, 자연히 난징 세력도 한데 뭉쳐 야당인 국민당을 창당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국민당의 존재에 심히 부담을 느꼈다. 국민당은 1913년에 치러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보란 듯이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의원들을 매수하고 핵심 인물을 암살하는 등 무법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회의 동의도 얻지 않고 열강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의 차관을 얻었다. 초대 대총통이 갓 제정된 헌법을 어기는 격이다. 나아가 그는 반대하는 국민당 의원들을 파면하고, 끝내는 국민당마저 해산시켜 버렸다. 다수당이 없어졌으니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국회는 사실상 기능 정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만행은 끝나지 않았다. 1914년에 정식으로 총통에 오른 그는 유명무실해진 내각책임제를 폐지하고 총통제를 실시해 완벽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 이렇게 역사의 시계추를 반동 복고의 방향으로 되돌려놓은 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애초에 마음먹었던 황제가 되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여론을 조성한 뒤 국민대표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거기서 공화제와 입헌군주제를 놓고 투표하게 했다. 예상대로 체육관 선거의 투표 결과는 전원 입헌군주제 찬성이었다1972년에 유신헌법을 제정해 종신 대통령을 꿈꾼 박정희는 위안스카이를 본떴을지도 모른다. 그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해괴한 기구를 만들어 거기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3분의 1을 선거하게 했다. 이렇게 정부와 의회를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겉모습만 공화국일 뿐 사실상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북양군벌의 모습

 

 

드디어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될 꿈에 부풀었는데, 이 문제는 워낙 사안이 중대한 탓에 전국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그에게 지지를 보냈던 서구 열강도 제국이 부활하는 것만은 찬성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의 지시를 받은 국내 혁명당원들은 타도 위안스카이를 부르짖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현재의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호국군(護國軍)이라고 자칭했다. 위안스카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황제 즉위를 강행하려 했으나 그의 심복 부하들마저 반대하고 나섰다. 비로소 대세의 불리를 깨달은 위안스카이는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포기했다. 울분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그 뒤 석 달 만에 병사했다.

 

독재자가 죽으면 분열기가 온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그의 지배 아래 있던 북양군벌들은 일제히 각지에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옛 왕조시대의 번진들처럼 사병 조직은 물론 자기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옛날 번진들은 새로운 통일 왕조를 꿈꾸거나 제도를 정비하는 등 발전적인 측면도 있었고 역사적 안목도 가졌으나, 20세기의 군벌들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봉건적 장애물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각 방면으로 열강과 결탁하고 있었으니, 제국주의의 하수인이자 앞잡이이자 매국노였다.

 

군벌들은 정부 요직도 나누어 먹기식으로 독점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라는 우두머리가 없으니 사안마다 내분이 일었다. 때마침 유럽에서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여부를 둘러싸고 대총통과 국무총리가 대립하는가 하면,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선통제를 복위시키려는 군벌도 등장했다. 급기야 군벌들은 서로 무력을 동원해 치고받으면서 정권을 주고받는 무정부 상태를 연출했다.

 

강남에서도 군벌이 할거하는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국회가 해산된 뒤 국회의원들이 개입하고 쑨원이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강북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강남의 군벌들도 광저우를 중심으로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였다. 이 다툼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들은 광둥 정부를 세우고 북양군벌과 대치했다. 이로써 강북에는 북양군벌들이 중심이 된 베이징 정부, 강남에는 서남 군벌들이 중심이 된 난징 정부가 들어섰다. 이 기묘한 남북조의 분열기를 맞아 바야흐로 중국은 끝 모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북양군벌의 우두머리들 군벌의 우두머리 위안스카이가 죽자 북양군벌 세력은 3대 군벌로 갈렸다. 왼쪽부터 돤치루이(段祺瑞), 장쭤린(張作霖, 장쉐량의 아버지), 펑궈장(馮國璋)이다. 수천 년의 제정이 끝나고 신생 공화정이 들어선 직후, 중국 역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이 시기 10여 년 동안 중국은 이 군벌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기회를 놓친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험난한 공화정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한 지붕 두 가족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합작의 성과와 한계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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