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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합작의 성과와 한계(7ㆍ7사변,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합작의 성과와 한계(7ㆍ7사변, 중일전쟁, 난징대학살)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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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작의 성과와 한계

 

1차 합작은 군벌이 신생 공화정을 위협하는 대내적 상황에서 이루어졌지만, 2차 합작은 바깥의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달랐다.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둔 만큼 1차 때와 달리 이번 합작은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열세에 놓여 있다가 합작에 한껏 고무된 공산당은 토지개혁이나 계급투쟁 등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에서 크게 양보하고, 필요하다면 홍군이라는 명칭도 바꾸겠다고 제안했다. 공산당의 전향적인 자세에 국민당도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양당 간에는 자못 따뜻한 화해의 기류가 흘렀다. 행정 수반은 장제스가 맡았으며, 홍군은 국부군 내로 편입되었다.

 

곧이어 합작의 효과를 과시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193777,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날 밤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실종되자 일본은 이것을 구실로 이튿날 군대를 출동시켜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이 사건을 77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는 별다른 명칭이 붙을 필요도 없을 만큼 사소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일본 측의 조작인지는 모호하지만, 이후의 사태를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흘 뒤 양측은 간단한 협정을 맺고 사태를 확산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보고를 접한 일본 정부는 필요 이상으로 격분하면서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응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설령 그 사건이 우연한 사고였다 해도, 어떻게든 전쟁의 꼬투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던 당시 일본 정부로서는 좋은 구실이었다.

 

합작으로 무장한 중국도 이번에는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양측의 조건이 맞아떨어져 루거우차오 사건은 일약 중일전쟁이라는 전면전으로 비화되었다(1945년까지 8년간 지속되었기에 중국 역사에는 8년 전쟁이라고도 기록된다). 16세기의 임진왜란(壬辰倭亂), 19세기의 청일전쟁에 이어 일본은 또다시 중국과 3차전을 벌이게 되었다. 임진왜란에서는 중국이 이겼고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이 이겼으니 이제 최종 결정전인 셈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큰 규모의 전쟁이 될 줄은 일본도, 중국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 때와 달리 일본은 처음부터 자신만만했다. 만주사변 이후 6년 간 소규모 국지전으로 시험해본 결과 중국의 실력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문제는 전쟁이 몇 개월이나 갈 것이냐에 있다. 이게 당시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당시 유럽 세계는 에스파냐 내전과 파시즘의 성장으로 온통 뒤숭숭했으므로 일본은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가급적 단기전으로 끝내고자 했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3개월이면 화북 전체를 점령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난징의 국민당 정부도 항복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겼다.

 

 

전쟁을 낳은 다리 루거우차오는 원 대에 마르코 폴로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감탄한 이래 마르코 폴로교라고도 불려왔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 침략에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던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삼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의 낙관은 국공합작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우선 장제스가 예전과 달리 강력한 대일 항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게다가 규모와 화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늘 국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인 홍군이 항전에 동참했다. 화북의 홍군은 팔로군(八路軍)으로, 화남과 화중의 홍군은 신사군(新四軍)으로 편성되었다. 홍군을 이끌던 주더(朱德, 1886~1976),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린뱌오(林彪, 1907~1971) 등 유격전의 명수들은 비로소 진정한 적을 맞아 벼르고 있었다.

 

베이징과 톈진을 함락시킬 때까지는 그런대로 일본의 일정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산둥과 산시에서 팔로군의 거센 공격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정예 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미 예정된 3개월을 넘어섰고, 일본 측의 희생도 예상외로 엄청났다. 전쟁 개시 5개월 만에 간신히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그 분풀이로 30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잔인한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다.

 

단기전의 구상은 실패했지만 일본은 역시 강했다. 난징을 점령하자 황해에 면한 중국의 요지는 모조리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초기 전황은 100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순식간에 중국의 동해안 일대를 제압한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은 100년 동안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100년 전과의 차이는 적의 자세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은 중국을 영토적으로 점령하거나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경제적 이권만 뜯어내려 했을 뿐이다. 그 반면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대륙 전체를 한반도처럼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초기에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것은 똑같지만 이후의 사태는 크게 달랐다. 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서쪽의 우한으로 옮겼다가 우한이 점령당하자 다시 오지인 충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후퇴를 계속하면서도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광저우마저 점령해 중국의 해안 전체를 장악했다. 이때부터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군수품을 보급받기 시작했는데, 항구라는 항구는 모조리 일본에 점령당한 탓에 보급품을 미얀마와 윈난을 거쳐 육로로 운송해야 했다(당시 미국은 일본에도 석유와 철, 기계 부속 등 군수물자를 대량 수출하고 있었으니 중국만 도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단기전의 문제점은 바로 이 시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선이 너무 넓어져버린 것이다. 일본군의 병력으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남북으로 무려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동해안 일대를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 반면 중국은 내륙으로 몰린 덕분에 근거지만을 집중 방어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내륙 방면으로 더 이상 진격하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단기전을 계획한 일본군은 처음부터 도시와 철도, 도로, 통신선을 중심으로 정복했기 때문에 중국 서부의 산악 지대로 갈수록 기동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중국은 전면전을 피하고 홍군의 특기인 초토화 작전과 치고 빠지는 유격전으로 맞섰다.

 

42.195킬로미터를 뛰는 마라톤에서도 35킬로미터 지점이 가장 어렵다고 했던가? 일본군은 2000킬로미터 이상을 숨 가쁘게 달려 왔지만, 우한에서 충칭까지 600킬로미터를 앞두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여기서 전선은 교착되었다. 1938년 말부터 1941년 말까지 3년간 전쟁은 전형적인 지구전과 소모전의 양상이었다.

 

 

제국주의의 학살극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패잔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사진은 당시 양쯔 강 연안에 쌓인 중국인들의 시신이다. 공식적으로는 129000명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30여만 명이 죽었다.

 

 

원하던 형세는 아니었지만 일본도 이제는 장기전의 태세를 취해야 했다. 한 가지 방법은 만주를 점령할 때 써먹은 수법이었다. 일본은 베이징과 몽골, 상하이, 난징 등 주요 점령지마다 괴뢰정권을 세웠다. 특히 난징 정부는 매우 깔끔하게 구성되었다. 일찍이 국민당 좌파의 중심인물로 장제스와 맞수였던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해 일본의 품에 안긴 것이다. 정치 지도자에서 좌파의 변절자로, 또 민족의 매국노로 변신한 왕징웨이는 19403월에 일본이 모든 괴뢰정부를 난징 정부로 통합하자 통합 괴뢰정부의 수반, ‘허수아비의 왕이 되었다마침 3개월 뒤인 19406월 독일은 일본의 전례를 커닝이라도 한 것처럼 프랑스를 점령하고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권을 구성했다. 공교롭게도 왕징웨이가 과거에 국민당의 핵심 지도자였듯이 페탱도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영웅이었다. 왕징웨이는 지병으로 일본에 건너가 치료를 받다가 1944년에 죽었고, 페탱은 독일로 도피했다가 종전 직후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대서양의 요새에 갇혀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다 1951년 아흔다섯 살로 죽었다.

 

지구전이 계속되자 중국 측에도 문제가 생겼다. 1938년까지 2년 동안, 일본군에 전반적으로는 밀리는 가운데서도 합작은 완벽했다. 장제스는 충칭 정부 내에 공산당원들을 받아들였고, 공산당 기관지의 발간까지도 허용했다. 전선에서 홍군은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이렇게 공동의 적이 압박할 때는 통일전선이 제대로 통했으나 전선이 교착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장제스는 비록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합작하게 되었지만, 공산당의 근절이 먼저라는 신념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1939년부터 그는 공산당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중단한 사상 통제도 재개했다. 합작의 정신에 등을 돌리기는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 간부들에게 근거지 확대에 70퍼센트의 노력을 기울이고, 국민당을 대하는 데 20퍼센트, 대일 항전에는 10퍼센트만 할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전쟁 초기와 달리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유격전으로 질질 끌면서 후방에 변구(邊區, 해방구)를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전선의 교착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화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급기야 양측은 무력 다짐까지 벌이기에 이르렀다. 먼저 배신한 것은 장제스였다. 194110월에 그는 황하 이남에 있던 홍군에게 황허 이북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홍군은 마지못해 따랐는데, 그것은 장제스의 교활한 계략이었다. 그는 8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홍군을 습격했다. 7일간의 전투 끝에 7000명의 신사군이 궤멸을 당했다. 이 완난(皖南)사변으로 2차 국공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이렇게 적정이 내분되어 있을 때 만약 일본군이 총공세에 나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당시 일본도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중국을 점령하는 게 여의치 않자 일본은 19409월에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사동맹을 맺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파시즘 국가들이 한데 뭉친 것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겠지만, 그간 일본이 에너지를 의존했던 미국이 석유 수출을 중단해버렸다. 일본은 노선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은 중국에서 기수를 돌려 동남아시아를 먼저 정복하기로 했다. 여기서 등장한 게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구호다. 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는 뜻이니 구호 자체로만 보면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공영이라는 문구로 미화한 것뿐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그 노선에 걸림돌이 되는 미국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194112,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바야흐로 아시아에서도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장제스식 외교 종전이 가까워지자 장제스는 전쟁 이후를 위해 서방과의 눈치 외교에 주력했다. 19452월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왼쪽부터)이 참가한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하면 소련이 극동 전선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연합국 측은 이 정보를 장제스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눈치 채고 처남을 모스크바에 보내 스탈린으로부터 장차 자신을 중국의 지도자로 승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인 그에게 스탈린과의 접촉은 지금 보아도 파격이다. 항일보다 반공이 먼저인 장제스였으나 반공과 권력 중에서는 권력을 택한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험난한 공화정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한 지붕 두 가족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합작의 성과와 한계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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