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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태평양전쟁, 정전협상, 중화인민공화국)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태평양전쟁, 정전협상, 중화인민공화국)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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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과 싸우는 중국은 자연히 연합국의 반파시즘 국제 통일전선의 일부가 되었고, 중일전쟁은 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의 직접적인 군사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 일본을 맞아 선전한 중국은 비로소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항일 전쟁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주선으로 중국이 연합국 4대 강국에 포함되어 장제스는 194312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루스벨트, 처칠과 자리를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전황은 크게 호전되었어도 한 번 금이 간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은커녕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달려갈수록 전쟁 이후를 염두에 둔 양측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1944년에는 양측의 험악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에서 특사를 파견해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만남을 주선했으나 그것도 별무신통이었다.

 

1945815, 일본의 항복으로 길고 긴 전쟁이 끝났다. 중일전쟁으로 치면 8, 세계대전으로 치면 6, 태평양전쟁으로 치면 4년이었다. 승전국은 원하는 평화, 패전국은 원치 않는 평화를 얻었지만, 중국 대륙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종전이 이루어지자 양측의 갈등과 경쟁은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신경전이었다. 홍군의 지휘관 주더가 홍군을 동원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다음 날 주더에게 그 조치를 취소하라면서, 일본군 측에 국부군에게만 투항하라고 명했다. 그 조치에 반발해 주더는 일본군에게 홍군에게만 투항하라고 명했다.

 

마침 홍군에게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종전 일주일 전에 참전을 선언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만주로 들어온 소련군이 일본군에게서 압수한 무기와 장비를 홍군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소련 덕분에 만주를 선점한 공산당은 각지에서 국민당에 앞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활발한 기동력을 보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믿는 도끼는 따로 있었다.

 

이미 전쟁 중에도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전쟁 이후를 준비하는 방식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마오쩌둥은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면서 후방의 농촌 지역을 장악하는 데 주력한 반면, 장제스는 휘하의 군 조직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외교에 주력했다. 그 결과 장제스는 종전 후 연합국 측의 중추로 떠오른 미국으로부터 국민당 정부를 지원한다는 확고한 약속을 얻어냈다. 병력으로나 외교로나 마오쩌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장제스는 종전 즉시 미루어둔 내전을 재개한다는 방침이었으며, 이 내전에서 손쉽게 승리할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홍군의 활약 국공합작으로 홍군은 신사군과 팔로군으로 편성되어 항일전에 참여했다. 이 사진은 팔로군 기병대의 모습이다. 합작의 성과는 금세 드러났다. 유격전에 능한 홍군은 곳곳에서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을 괴롭히는 전과를 올렸다.

 

 

194512, 미국의 주선으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1월에는 양당 간에 정전협상이 체결되었다. 일견 평화가 깃들듯 보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오로지 단독 정권만 염두에 두었을 뿐 협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먼저 배신한 측은 당연히 장제스였다. 19463월에 열린 국민당 중전회(中全會)에서 장제스는 협정을 팽개치고 반공을 가결해버렸다타고난 반공주의자라는 점에서 장제스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비슷하다. 같은 세대의 두 사람은 완고한 성품도 비슷하고 지독한 권력욕도 닮았다. 이승만은 중국의 정황과 비슷한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는 물론 미군정까지도 권하는 좌우 합작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단독정부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장제스와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조국의 분단마저도 마다하지 않은 권력의 화신이었다. 그뿐 아니라 분단 이후 집권하고 나서 독재로 일관한 것마저도 아주 잘 어울리는 동류다. 다만 장제스의 대만보다 이승만의 남한이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승만이 좀 더 성공했다고 할까?.

 

하지만 공산당은 장제스의 계획과 상관없이, 또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각지에서 농민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이끌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 혁명을 활발히 전개했다. 국민당의 지지층인 지주들은 당연히 아우성을 질렀다.

 

바야흐로 내전은 출발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도발은 역시 장제스가 먼저였다. 19466월에 그는 공산당의 근거지인 해방구들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이 물러갔으므로 이제는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전면전이다. 당시 국부군은 총 병력 430만 명에 미국의 군수물자와 미군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으니, 120만 명의 병력에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구식 무기로 무장한 홍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예상대로 국민당의 압승지세(壓勝之勢)였다. 국부군은 상하이와 난징 등 강남부터 착실하게 땅따먹기를 시작하더니 19473월에는 마침내 홍군의 수도라 할 산시의 옌안까지 손에 넣었다.

 

옌안은 12년 전 대장정의 최종 기착지이자 새 근거지였으니 그곳을 잃은 홍군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지만 그것은 홍군의 전략이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홍군은 처음부터 전략적 후퇴를 거듭했다. 전면전을 피하고 유격전으로 임했을 뿐 아니라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을 확보했다. 국부군은 전투마다 승리했으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그랬듯이 도시와 교통로만 점령하고 병참선이 늘어지면서 병력이 분산되었다. 게다가 점령지마다 장제스 특유의 독재와 억압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지역 민중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그 반면 홍군은 점령지마다 농민들을 고무하고 입대시켜 오히려 패배할수록 병력이 증가했다.

 

 

연안에 온 특사 큰 전쟁이 끝났는데도 중국에서 내전이 재개될 조짐이 보이자 19461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 조지 마셜이 흥군 근거지인 옌안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장제스는 미국이 추선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내전에 돌입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저우언라이, 마셜, 주더, 그리고 한 사람 건너뛰어 마오쩌둥이다.

 

 

전환점의 신호탄으로 마오쩌둥은 옌안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시기에 홍군을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 명칭에 걸맞게 국면은 거짓말처럼 급변했다. 인민해방군은 밀릴 때까지 밀린 다음 소도시부터 하나씩 수복하기 시작했다. 국부군이 장악한 대도시는 자연히 고립 상태에 빠졌다.

 

1947년 말에 마오쩌둥은 비로소 자신감을 보이며 내전이 전환 국면을 맞이했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듬해인 1948년 초부터 인민해방군은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병력은 이미 비등해졌고, 전투의 주도권은 인민해방군으로 넘어왔다. 그 해 말에는 린뱌오의 부대가 만주 전체를 수중에 넣었다. 이어 한 달 만에 화북을 장악하고, 쉬저우에서 벌어진 내전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인 회해(淮海) 작전에서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의 부대가 한 달간의 혈전 끝에 국부군의 정예 부대를 격파했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국부군은 이후 지리멸렬에 빠졌고, 인민해방군은 드디어 이듬해 1월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제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장제스는 서구 열강에 도움을 청하는 한편 공산당에 평화 교섭을 제의했다. 그러나 열강과 공산당 양측에서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회신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곧 대세가 정해졌다는 뜻이었다. 장제스는 결국 총통에서 하야하고 이종인(李宗仁)에게 총통 대리를 맡긴 뒤 대만 철수를 준비했다.

 

19494, 인민해방군은 양쯔 강을 넘어 별다른 전투 한 번 없이 남하하면서 난징과 항저우, 상하이, 우한, 광저우 등지를 차례로 점령했다. 81,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갔고, 9월에 인민해방군은 중국 본토를 모조리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49101, 수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2000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는 20세기 초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붕괴했지만,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40년의 진통이 더 필요했다.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194910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청이 멸망한 이후 40년 가까이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이 다시 통일되었고, 중국의 오랜 왕조사가 끝났다. 크게 보면 한족과 이민족이 번갈아 지배했던 역사도 끝나고,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험난한 공화정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한 지붕 두 가족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합작의 성과와 한계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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