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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만주사변, 시안사건)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만주사변, 시안사건)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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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장제스가 공산당의 토벌에 여념이 없던 1931918일에 만주에서는 한밤중의 정적을 뚫고 느닷없이 포성이 울렸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 남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구실로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한 것이다. 918사건이 바로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본국 정부의 승인도 없이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선전포고 같은 절차도 없었다(사실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침략 전쟁을 도발했으나 한 번도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관동군은 단기전으로 만주를 점령해버릴 속셈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서구 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관동군은 일본이 건설한 남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1905년부터 만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 투자된 외국자본 중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의 자본일 정도로 일본은 만주 경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창 뻗어가던 일본 경제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제동이 걸렸다.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공황의 직접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일본은 이미 에너지를 포함해 경제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여느 나라들처럼 번영과 안정을 꾀하는 게 아니라 중국 침략, 나아가 아시아 정복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그 위기를 단지 극복하기보다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야 했다. 일본의 정치를 장악한 군부는 군국주의다운 해법을 내놓았다. 만주를 경략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점령하는 것만이 일본의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만주사변은 그저 관동군의 독자적인 결정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허수아비 제국 1932년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를 즉각 영토화하기보다 잠시 허수아비 정권을 내세우는 게 정치적 부담이 적었을 것이다. 사진은 동원된 만주의 어린 소녀들이 만주국기와 일장기를 손에 들고 흔드는 장면이다.

 

 

당시 만주는 청년 군벌인 장쉐량(張學良, 1898~2001)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관동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손쉽게 만주 전체를 장악했다. 이참에 만주를 완전한 일본 영토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겠지만, 서구 열강의 보는 눈이 많은 마당에 아직 그러기에는 일렀다. 그래서 일본은 그 이듬해인 1932년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불러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만들었다.

 

물론 장쉐량이 관동군을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텃밭에서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그렇듯 쉽게 만주를 내줄 수 있는 걸까? 사실 여기에는 단지 군사력의 차이만이 아닌 정치적ㆍ정략적 의도가 있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근거지를 침략하는 관동군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장제스는 왜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적은 공산당과 일본, 이렇게 둘이었다. 장제스는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세를 몰아낸다는 것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던 것이다(일본보다 공산당이 자신의 권력 기반에 더 큰 위협 요소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연히 그의 일차 목표는 공산당과 홍군이었다. 일본의 위협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오로지 토벌에만 전력투구했다. 자기 혼자만 그랬다면 그런가 보다 싶겠지만, 그는 휘하의 군벌인 만주의 장쉐량에게도 일본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항일에는 여력이 없었으므로 장제스는 일본의 만주 침략 문제를 국제연맹에 의뢰했다. 그러나 일본은 장제스보다 훨씬 과감한 행동으로 그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린다. 만주에서 물러나라는 국제연맹의 권고를 받자 1933년에 아예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린 것이다. 나아가 일본은 국제 여론과 중국 국내 여론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일운동의 중심지인 상하이를 공격했다.

 

그래도 장제스는 초지일관 공산당만을 겨냥했다. 오로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중국 민중의 항일운동까지 가혹하게 탄압했다. 대문 앞에 대적이 쳐들어왔는데도 방 안의 식구를 닦달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 중국 민중의 마음은 결정적으로 공산당에 기울었다.

 

관동군이 베이징과 선양 사이의 러허 성까지 진격해오자 그제야 장제스는 황급히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대응은 중국 민중이 고대하던 응전이 아니라 굴복이었다. 1933531, 그는 일본과 탕구(塘沽) 정전협정을 맺고 일본의 만주 점령을 사실상 양해했다. 심지어 협상 도중에 서북 군벌 펑위샹(馮玉祥, 1882~1948)의 군대가 러허를 수복하기 위해 관동군을 공격하려 하자, 장제스는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13개 사단을 보내 펑위샹을 제압했다.

 

사실상 중국의 단독 지배자인 장제스가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민족적 열망을 뒤로한 채 자신의 권력욕을 앞세우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19세기 말에 독일도 후발 제국주의인 탓에 중국 침탈에 특히 그악스럽게 굴었지만, 더 후발 제국주의인 일본은 독일보다 한술 더 떴다. 만주를 점령해 중국 침략의 기반을 닦은 뒤 일본은 더 멀리까지 손을 뻗쳐 1935년에는 화북에도 괴뢰정권을 세웠다.

 

 

국민당과 달리 공산당은 항일을 최우선으로 들고나왔다. 봉건 지주층의 지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과는 이념적으로도 다른 데다 피착취계급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도 당연히 항일에 몰두해야 했지만, 국민당이 항일을 포기했으니 전략적으로도 항일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국민당의 집요한 공격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인력과 비용이 들지 않는 전환점은 바로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표방하는 것이었다. 대장정 중이던 193581일에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자는 81선언을 발표했다.

 

때가 때인지라 이 선언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오랜 정쟁과 내전에 진저리가 난 중국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즉각 중국 전역에서 호응이 잇달았다. 민간단체들도 일제히 내전 중지와 항일 구국에 일로매진하자고 외쳤다. 이쯤 되자 국민당 지도부도 거국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내전이 우선 과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장제스 혼자만 남았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장제스의 병적인 의지를 꺾은 사람은 바로 장쉐량이었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때 장제스의 지시로 저항하지 않았다가 졸지에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을 혼자 뒤 집어쓴 바 있었다. 심지어 그가 이끄는 동북군 내에서도 텃밭을 일본에 빼앗기고 시안까지 쫓겨난 데 대해 병사들의 불만이 컸다. 마침 동병상련의 친구도 있었다. 관동군에 맞서 싸우려 했다가 장제스에게 호되게 당한 서북 군벌의 펑위샹이다.

 

19365, 장쉐량은 펑위샹과 함께 공산군과 공동으로 항일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수상한 느낌을 감지한 장제스는 그해 12월 장쉐량에게 압력을 가하고 내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왔다. 부하가 반기를 들었는데도 그는 그 부하의 의지와 그 반기의 의미를 충분히 읽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적의 소굴로 찾아든 장제스, 마치 2200년 전 유방(劉邦)이 항우가 있던 홍문(鴻門)을 찾아간 사건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유방일 수 없고 장쉐량이 항우일 수도 없지만, 더 큰 차이는 그때 유방을 구한 번쾌가 없다는 점이다.

 

일단 장쉐량은 상관인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에 나서자고 탄원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장제스는 시안에 오지도 않았다. 상관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 대세를 좇을 것이냐 고민하던 장쉐량은 1212일 새벽에 장제스의 숙소를 덮쳐 장제스와 휘하 막료들을 체포해버렸다. 이 쿠데타를 시안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하에게 체포된 하극상의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완강했다. 장쉐량은 그렇다면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때 번쾌는 없었어도 번쾌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장제스를 살리는 게 장차 통일전선에 유리하리라는 판단에서 공산당이 파견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장제스가 남편이므로 당연히 살려야만 하는 그의 아내 쑹메이링(宋美齡, 1897~2003)이 바로 그들이다.

 

훌륭한 품성과 뛰어난 논리로 이름을 날린 저우언라이와 누구보다도 가까운 아내, 둘 중 누구의 설득이 더 주효했는지는 모르지만, 장제스는 마침내 장쉐량의 제안을 수락했다(그는 장쉐량이 자신을 죽이려는 각오까지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에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결별한 지 9년 만에 2차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아버지의 원한으로 펑텐(선양) 군벌 장쉐량의 아버지인 장쭤린은 일본과 결탁했다가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결별했다. 그러자 1928년에 관동군은 그가 타고 가던 열차를 폭발시켜 살해했다. 이런 배경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일본에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근거지를 침략하는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장제스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러나 쌓인 울분은 몇 년 뒤 시안 사건에서 터져 나온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험난한 공화정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한 지붕 두 가족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합작의 성과와 한계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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