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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대약진운동)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대약진운동)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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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취한 정당이다. 1920년 전국대표회의에서 공산당을 창립한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Grigori Voirinsky)와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는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에 비해 이론적인 깊이는 부족했지만, 그들과 창당을 함께한 마오쩌둥도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그들과 달랐다.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마르크스는 원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면 낡은 체제가 되어 자동으로 붕괴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 발전의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사회 질서도 그 내부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또한 그 물질적 존재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새롭고 고도한 생산관계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노동계급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야만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경제적 생산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자본주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선진 자본주의는커녕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지도 않은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다. 1917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제정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봉건 체제였다. 그런 상태에서 레닌의 볼셰비키 당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경제적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혁명이 아니라 인위적인 혁명이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 혁명은 성공했고, 노동자와 병사가 소비에트를 이루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중국은 혁명에 성공한 것만 같을 뿐 모든 조건이 러시아보다 더 나빴다. 러시아만 해도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서지는 못했어도 엄연한 제국주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20세기 초까지 정치적으로 러시아보다 더 후진적인 제정이었고(그래도 제정러시아에는 초보적인 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트보가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러시아보다 뒤졌다(중국의 노동계급은 수에서나 계급의식에서나 제정러시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소련도 정상적인사회주의국가로 볼 수 없다면 중국은 더할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과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국가가 가능할까? 그래서 1949년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출범한 중화인민 공화국은 여러 가지 이론적ㆍ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분명히 사회주의자였지만 그가 구상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달랐다. 우선 중국은 노동자보다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점에 주목한 마오쩌둥은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해,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농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인민해방군도 거의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사실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는 크지 않다. 피착취계급이라는 점에서 처지가 같고, 따라서 해방을 지향하는 계급의식도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사회주의혁명을 이루기 전에 이미 해결되었어야 하는 문제들이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한 뒤에 과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경제와 정치의 두 측면으로 나타났다.

 

나라는 새로워졌으나 오랜 전란으로 중국의 경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 반세기 가까이 중앙 정부가 없었다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게다가 농민에 기반을 둔 공화국이었다. 그런 만큼 토지개혁은 새 정부의 가장 절실한 과제였다.

 

공산당 정부는 매년 수십만 명을 각지의 농촌으로 파견해 당의 정책을 농민들에게 설명하고 지역 실정에 맞게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농민에 대한 착취를 일삼은 부농과 봉건지주는 재판으로 다스리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해 경작자인 농민에게 재분배했다. 토지와 더불어 농구, 가축, 가옥까지 재분배했으니 가히 중국 역사 상 최대 규모의 개혁이었다. 개혁의 성과는 금세 나타났다. 1952년까지 2년여의 기간 동안 중농 20퍼센트, 빈농 70퍼센트였던 토지 점유율은 정반대로 비례가 역전되었다. 아직 생산성은 무척 낮았으나 수천 년간 봉건적 지배층이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을 착취하던 구조가 타파된 것은 장차 농업 생산력에서도 큰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농업정책은 중국 사회의 해묵은 모순을 해소하는 취지가 강했고, 진짜 중요한 것은 공업 분야의 개혁이었다.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한 문제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자본주의사회가 경제적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이유는 사적 이윤의 추구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 활동이 경제성장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사회에는 사적 기업이 없는 것이다.

 

물론 중국에 기업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생겨난 기업들은 대부분 서구 열강이 중국을 수탈하기 위해 설립했거나 군벌이나 고위 관료 등 전통의 세력 가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공산당 정부는 이런 기업들을 몰수해 국영기업으로 바꾸고 제국주의 자본과 관료 자본을 국유화했다. 그렇다면 사적 기업이 없는데 어떻게 생산력을 증대시킬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거대한 국영 기업을 출범시켰다. 그것이 바로 1958년에 설립한 인민공사(人民公社). 인민공사는 원래 각지에 세워진 집단농장들을 통합하면서 생겨났으므로 농업 기반의 조직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생산 부문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최소 생산 단위인 생산대는 상부 조직인 생산대대가 관리하고, 이 생산대대들이 인민공사로 통합되었다.

 

인민공사는 사회주의국가가 운영하는 조직인 만큼 착취를 위한 기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 기업이나 다름없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인민공사가 인민을 착취한 것이다. 국가의 경제력 전체는 커졌어도 착취이기 때문에 그 혜택은 인민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착취의 근절이 사회주의의 경제적 목표라면 중국식 사회주의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신속하게 서구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국가의 주도로 무리한 계획경제를 추진한 탓에 중국 인민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이 문제는 소련식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1917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신생국 소련의 경제를 일거에 성장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경공업과 소매업 같은 소규모 생산 분야에서 사적 소유와 경영이 허용되었으나 이내 농장의 사유, 이윤 추구도 장려되어 사실상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분에 1920년대에 소련은 잠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1930년대부터는 다시 철저한 계획경제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소련은 내내 경제적 약점에 시달렸다. 20세기 소련이 해체된 것은 근본적으로 경제의 실패가 원인이다.

 

 

대약진 운동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1958년 비약적인 생산력 향상을 위해 대약진 운동을 제창했다. 이런 생산 증대 운동과 더불어 중소 규모의 집단농장을 대구도 인민공사로 개편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였다. 위 포스터에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어가자[继续大跃进]”라고 씌어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한 데 따르는 경제적 문제라면, 정치적 문제는 제왕적 사회주의다.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쌍둥이처럼 함께 생겨나 함께 발달했다.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의 경제적 표현이고, 의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중국은 제국 시대를 끝내고 수십 년간의 분열기를 겪은 뒤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했기 때문에 의회민주주의가 성립할 토양이 없었다.

 

그 결과 중국은 명색이 사회주의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전의 제국들처럼 1인 집권 체제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말하자면 사회주의 황제인 셈인데, 지위가 세습되지만 않았을 뿐 절대 권력에다 임기가 정해지지 않은 종신 권력인 것은 옛날의 천자와 다를 바 없었다(북한처럼 권력 세습까지 이루어지는 변종 사회주의도 있다).

 

공화국의 건국자인 마오쩌둥이 송을 건국한 조광윤이나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 같은 초대 황제라면, 그의 사후 화궈펑(華國鋒),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등으로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계보는 그대로 황실의 계보나 마찬가지다이 점 역시 소련도 겪은 문제다. 혁명 이후 레닌-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로 일인자 계보가 이어지는 소련의 권력 구조는 옛 러시아 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에 비해 마이너에 속하는 사회주의국가들도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루마니아의 게오르기우데지는 1952년부터 죽을 때까지 집권했고, 그의 뒤를 이어 1965년부터 집권한 차우셰스쿠는 1989년 공산당이 무너질 때까지 권좌에 있었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1959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쿠바의 독보적인 일인자로 남아 있다. 이런 권력 구조는 명백히 과거 제국 체제로의 퇴행이다. 헌법상 최고 권력기관은 2000~3000명의 인민 대표로 구성되는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가 있지만, 이것은 1년에 한 번 소집되는 데다 실제로는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전인대는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 이미 정해진 인물이 선출된다. 게다가 전인대는 의회민주주의의 용어로 말하면 입법부와 행정부를 겸하므로 의회민주주의의 기초인 삼권분립의 원칙에서도 벗어난다.

 

중국은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취했으나 공화정과 의회민주주의는 중국에서 자생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은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천자 한 명이 천하를 지배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중국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피지배층인 인민들도 그랬다.

 

경제와 정치에서 드러난 현재 중국 사회의 이중성은 장차 중국의 미래를 두 가지로 예상케 한다. 하나는 서구에서 탄생하고 발달한 의회민주주의 - 자본주의자본주의 체제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길이다. 중국 공산당과 사회주의는 이미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공산당은 서구의 정당이라기보다 사실상 의회와 같은 기능을 하며냉전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국가를 일당독재라고 여기지만, 사실 공산당을 서구식 공화정의 용어로 비유하면 정당이라기보다 의회에 가깝다. 그러므로 일당독재를 비판하려면 먼저 미국의 의사당 캐피털(Capitol)이 왜 워싱턴 한 곳에만 있느냐고 비판해야 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 걸맞지 않게 주식시장이 존재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중국에 수천 년의 역사적 전통이 반영된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어떤 형태가 되리라고 예상할 수도 없고 예상 자체가 무의미하다.

 

앞의 길이라면 글로벌로 향하는 인류 역사의 기본 흐름에 중국도 완전히 편입될 것이다. 또한 뒤의 길이라면 중국은 강력한 로컬을 이루어 글로벌의 흐름에 맞서 세계사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미래가 어느 길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중국 국민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험난한 공화정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한 지붕 두 가족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합작의 성과와 한계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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