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로 연장된 하극상④
정작으로 놀란 것은 히데요시다. 1596년 명의 사신이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칙서를 전하자 그는 격노했다. 사실 자신의 요구도 터무니없었지만 그 요구와 전혀 무관한 칙서를 보내는 건 또 뭔가? 모욕을 느낀 그는 다시 전쟁을 결심한다. 명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그게 오히려 전쟁을 불렀다.
이듬해 1월 히데요시는 재차 원정군을 보냈다. 명의 일개 무관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 달리 처음부터 히데요시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고, 개전 초부터 명의 지원군이 출동했다. 또 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해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순신이 건재했다. 결국 1598년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철수했다.
이로써 7년간에 걸친 일본의 침략 전쟁이 끝났다. 7세기에 백제가 멸망할 때 일본이 지원군을 보낸 것을 제외하면, 동북아시아 세 나라가 모두 얽힌 전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과 중국에서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일본 역사에서는 임진왜란이 ‘분로쿠(文祿)의 에키(役, 전쟁)’이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은 ‘게이초(慶長)의 에키’다. 여기서 분로쿠와 게이초는 모두 당시 천황의 연호다. 중국 역사에서도 황제인 신종의 연호를 써서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부른다. 조선은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했으므로 후대의 역사가들도 연호를 붙여 전쟁의 명칭을 지을 수 없었다】. 이 전쟁으로 일본이 패망한 것은 아니지만, 먼저 도발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므로 일본이 진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도발로 시작한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외 진출은 실패로 돌아갔다.
▲ 명 제국으로 가는 무역선 명 제국으로 가는 일본의 ‘공식’ 무역선이다. 하지만 감합이 제안되어 있어 대개의 무역은 사무역(밀무역)으로 이루어졌다. 감합이 적은 것도 임진왜란의 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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