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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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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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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고이왕(古爾王)이 즉위하던 3세기 중반 백제의 왕권은 두 계파로 나뉘어 있었다. 이 두 갈래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2세기의 왕인 개루왕에게서 이어진다. 그에게는 최소한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각 계파의 원조가 된다. 일단 맏아들(초고왕)이 왕위를 잇기는 했으나 둘째 아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기록에는 그 둘째 아들이 고이왕이라고 되어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이로 따지면 불가능하므로 고이왕은 아마 둘째 아들의 후손일 것이다).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214)과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234)의 시대 70년이 지나도록 그 세력은 계속 왕권을 노렸다. 이윽고 234년에 구수왕의 아들 사반왕(沙伴王)이 즉위하자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옹립한다. 사반왕이 퇴출된 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그랬다면 왜 얼마 가지도 못할 왕위를 굳이 계승시켰을까? 따라서 사반왕이 쫓겨나고 고이왕이 즉위한 사건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을 조상으로 하는 계파가 백제 왕실의 권력을 찬탈한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서 본 것처럼 고이왕이 새삼스럽게 백제의 관직을 정비하고 하늘과 땅에 대규모 제사를 지낸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은 마치 자신들이 나라를 새로 건국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호들갑을 떨지 않던가? 그러나 아들 책계와 손자 분서가 비명에 죽음으로써 고이왕(古爾王)의 지극정성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가 마련해 놓은 국가 발전의 기틀은 다음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것은 원래의 첫째 계파인 구수왕의 아들(사반왕의 동생)인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이었다여기에도 또 한 번의 왕계 미스터리가 있다. 비류왕이 즉위한 해는 304년인데, 구수왕이 죽고 사반왕이 폐위되고 고이왕이 즉위한 해는 그보다 무려 70년이나 앞선 234년이다. 따라서 비류왕은 구수왕의 아들과 사반왕의 동생이 될 수 없고, 아마 구수왕의 손자이거나 증손자였을 것이다. 이렇듯 4세기까지도 왕계가 불확실할 만큼 백제의 초기 역사에는 불완전한 측면이 많다. 이 점은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백제 역사가 홀대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가 백제의 역사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신라는 백제를 늘 원수로 여겼으며, 오로지 백제를 제거하기 위해 중국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또한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金富軾)이 신라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삼국사기에는 백제 부분이 가장 적을 뿐 아니라 내용도 가장 빈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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