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위기 = 고구려의 기회②
이러한 한나라의 위상 변화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삼국 중에서도 단연 고구려다. 사실 말이 삼국시대지 당시 백제와 신라는 간신히 역사에 명패만 올려놓았을 뿐 나라라 할 것도 없는 처지였다(후대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백제와 신라라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고구려에 비해 대륙 문명권에서 먼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는 그때까지 국가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보잘것없는 부족연맹체들이 난립하면서 문명적으로도 후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할 기회가 없을지 모르니 이 참에 반도 중부와 남부를 간단히 개괄하고 나서 고구려의 활약상으로 넘어가자.
건국신화는 백제와 신라의 것만이 전해지지만 두 나라가 탄생할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는 수십 개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가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수천 호의 가구로 이루어진 데 불과하니까 오늘날의 군이나 읍 정도의 규모로 여기면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즉 폴리스를 연상하면 알기 쉽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했듯이, 한반도의 폴리스들도 서로 얽히면서 느슨한 연맹체를 이루었다. 그 연맹체를 대충 가름하면, 오늘날 충청도와 전라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마한(馬韓), 경상도 지역에는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이 있었다(이것을 합쳐 삼한三韓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의 중국 측 사서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이 ‘세 개의 한국’은 서로 간에 서열을 짓지 못하고 병립하는 데 만족했을 뿐이므로 나중에 이 지역의 정치적 통일은 연맹체 자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연맹체에 속한 백제와 신라라는 도시국가가 주도하게 된다.
그에 비해 고구려는 그와 차원이 다른 국가였다. 물론 고구려도 아직 일정한 강역을 지니는 영토국가는 못 되었고 각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연맹을 이루고 있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초기부터 하나의 국가로서 결집된 행동을 취할 정도의 위상은 뚜렷이 지니고 있었다. 다만 변수는 중국이다. 한나라는 비록 중앙정부가 약화되고 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국이었으므로 신생국 고구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주몽의 아들 유리왕(琉璃王, 재위 기원전 19~기원후 18) 대에 도성을 졸본성에서 더 후방인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오늘날 중국 지린성의 지안集安)으로 옮긴 것은 일단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어차피 고구려의 장기적 생존은 적어도 한나라의 동북쪽 변방, 특히 랴오둥을 물리치지 못하면 보장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때마침 왕망(王莽)의 집권 시기를 거쳐 후한이 들어서자 그 혼란을 틈타 고구려는 즉각 생존과 성장을 위한 작전 개시에 나선다【당시 중국의 정세 변화를 포착하는 고구려의 순발력은 놀라울 정도다. 유리왕 시절에 이미 고구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중국이 예전 같지 않다는 기미를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나라의 왕망(王莽)은 기원후 12년에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려 한 적이 있다. 그때 유리왕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병사들은 중국의 동원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쳐 버린다. 그리고 그들을 응징하기 위해 추격하던 랴오시(遼西)의 한나라 군이 오히려 역공을 받아 전멸한다. 고구려가 이렇듯 과감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왕망(王莽)의 집권이 불안정하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일 터이다】.
주인공은 고구려의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이다. 열다섯 살에 아버지 유리왕의 뒤를 이은 그는 곧바로 부여를 공략하여 멸망시킴으로써 할아버지 주몽의 원수를 갚는 것으로 정복사업을 출범시킨다. 이로써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비롯된 과거의 뿌리와 숙제를 모두 해결하고 완전한 새 나라로 정비됐다. 여세를 몰아 대무신왕은 압록강 상류를 손에 넣고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영토를 크게 키운다. 이제 고구려는 낙랑과 한반도의 주인 자리를 놓고 쟁패할 만큼 힘을 길렀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