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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지배인가, 전파인가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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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지배인가, 전파인가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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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인가, 전파인가

 

 

우거왕은 과연 항전의 의지만큼 승산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까? 그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고조선은 예상 외로 오래 버텼다. 한나라는 수도인 왕검성을 1년 이상이나 공략한 끝에 비로소 고조선을 정복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사건은 변방 정리 작업에 불과한 작은 일이었지만, 한반도 역사에서는 엄청난 격변이었다. 이로써 단군조선 이래 2천 년 동안 존속해 오던 고조선이 마침내 최종적으로 멸망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땅이 한나라의 영토로 바뀌었으니 이제 제국의 행정 체제에 따라 재편되는 것은 당연하다. 알다시피 한나라의 기본 체제는 군국제다. 초기에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한 사정을 감안해서 봉건제의 속성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나, 무제의 시대에 이르러 오히려 진 시황제를 능가하는 강력한 황제의 권력이 생겨났으니 이름은 변하지 않았어도 이때부터의 군국제는 사실상 군현제(郡縣制)나 다름없다. 전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편제하려는 무제의 의도에 따라 제국의 중앙정부는 랴오둥과 한반도 북부 지역을 네 개의 군으로 편성하는데, 그게 바로 낙랑 (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의 한4군이다한 무제가 꼭 고조선만을 괴롭힐 목적으로 한4군을 설치한 것은 아니다. 무제의 시절에 한나라의 영토는 크게 팽창했는데, 주요 정복지마다 한4군과 같은 군을 두어 변방의 방어에 주력하게 했다. 예컨대 월남, 즉 오늘날의 베트남에는 9군을 두었으니 말하자면 베트남 역사에서는 한9군인 셈이다.

 

4군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넓게 보면 랴오둥에서 오늘날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임은 분명하지만, 각 군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한반도 남부에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일찍이 준왕도 거기서 새 왕조를 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남부는 아직 힘의 공백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낙랑군은 현재의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였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낙랑군을 기준으로 추측해 보면, 진번군은 기원전 82년에 낙랑군과 통합되는 것으로 미루어 낙랑의 북부, 즉 압록강 하류와 랴오둥 부근인 듯싶다. 그렇다면 임둔군과 현도군은 낙랑-진번의 동쪽, 그러니까 만주 남부와 오늘날 한반도의 동북부까지 아우르는 지역일 것이다. 기원전 82년에는 임둔군도 현도군에 통합되어 4군은 2군으로 축소되며, 곧이어 7년 뒤에는 현도군이 옛 고조선 세력의 저항을 받아 북쪽의 만주로 밀려나면서 사실상 낙랑군만이 남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한4군은 고대에 겪은 민족적 치욕 정도로 간주될 뿐 별로 중시되지 않고 있다. 물론 당시 고조선에도 그것을 치욕으로 여긴 백성들이 적지 않았을 법하다. 고조선이 중국 문명의 전통적 영향력을 받아오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중국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원전 2세기라면 어느 정도 원시적인 민족의식도 생겨났을 테니 한나라의 지배에 대한 저항감은 제법 팽배했을 것이다.

 

 

 4군의 흔적 현재 평양시에 남아 있는 무덤 유적이다. 기단이 벽돌로 쌓여 있고 주변에도 벽돌담이 둘러진 축조 방식은 원래 중국식이다(한반도의 경우 삼국시대 중기까지 원형봉토식 무덤이 일반적이었다). 이 고분이 낙랑의 것임을 말해 주는 증거다. 4군의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지금의 평양을 포함하는 평안남도였을 게 거의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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