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으로 기수를 돌려라②
거듭되는 외침에다 흉년과 기근,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여러 차례 궁궐을 수리하고 증축하는 데 여념이 없다. 좋은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의 의도는 어떻게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이므로 무엇보다 궁궐이 화려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가 직접 한 말이니까. 그런 점에서 그가 취한 입장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300년이나 지나서, 게다가 심각한 인플레까지 감수하면서도 굳이 중건하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의도와 맥이 통한다. 사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무엇보다 국왕을 중심으로 국력을 결집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으며, 궁궐의 증축은 그것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측근들의 동의마저 얻지 못하는 정책이라면 설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실패하기 십상이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한 사람이 최익현이라면 봉상왕에게 반대한 사람은 창조리였다. 그러나 줄기차게 상소만을 거듭한 최익현과 달리 창조리는 왕을 갈아치우는 쿠데타를 획책한다.
그가 낙점한 새 왕은 바로 봉상왕에게 죽은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었다. 비정한 큰아버지의 눈을 피해 머슴과 소금장수로 은신해 온 을불은 창조리의 비밀 공작으로 팔자에도 없었던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다(최소한 아버지나 형이 왕이어야만 왕위를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바람직스런 현상은 아니겠지만 150년 전 명림답부의 경우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귀족들의 쿠데타가 있을 때마다 도약의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과연 귀족의 쿠데타로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이 된 소금장수 을불은 나라의 대내외적 우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우선 조카의 즉위를 본 봉상왕이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장차 권력 분쟁이 재연될 소지가 사라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외 정책이다.
중국의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했던 고구려 역대 왕들의 특징은 한동안 대가 끊겼다가 미천왕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다. 그가 바라보는 중국은 물론 혼돈의 도가니다. 팔왕의 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그러니까 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할 통일 제국이 못 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무렵 미천왕은 고구려에 기회가 왔음을 감지한다. 예전처럼 랴오둥에 미련을 두지는 않는다. 이제 전선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형성되어야 한다. 특히 모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지 80년이 넘었는데도 한군의 하나가, 더구나 중국과 접경하지도 않은 중국의 군현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미천왕의 눈앞에는 일찍이 동천왕(東川王)이 품었던 따뜻한 남쪽 나라의 꿈이 어른거린다.
목표인 낙랑을 치기 전에 미천왕은 몸을 풀 겸해서 랴오둥의 현도(지금의 푸순)를 공략하고 서안평을 손에 넣는다. 예상대로 손쉬운 승리다. 곧이어 313년에 드디어 그는 대망의 낙랑 정벌에 성공한다. 자명고가 찢어진 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으니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로써 고구려와 한반도의 역사는 외세를 완전히 물리침으로써 신기원을 맞았다. 이듬해 미천왕은 낙랑 남쪽에 남아 있던 대방(帶方)마저 정복해서 백제와 접경하게 되니, 바야흐로 삼국시대의 시작이다.
▲ 중국의 지방문화재 우리는 고구려를 한반도의 한 왕조로 간주하지만,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고구려의 옛 유적은 그저 하나의 지방문화재 일 뿐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지안에 사는 중국인들은 문화재 관리 시설조차 없는 환도성의 고분들 사이를 누비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 과거의 역사와 오늘의 관점을 어떻게 연관지어야 통시대적인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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