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분열의 시대로②
한반도 중부를 잃으면서 이제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 남부로 축소되었다. 아직 만주에 발해가 존속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남북국시대가 아니라 ‘남중북국시대’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신라는 이미 남부에서마저도 주인이 아니었다. 양길이 봉기한 이듬해 이번에는 전주에서 견훤(甄萱, 867?~936)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로 장군이 된 그는 한반도 남해와 서해를 지키면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무주(지금의 광주)까지 손에 넣어 호남 전역을 지배한다(이 지역은 불과 한 세대 전에 장보고가 지배했던 곳이었으니 견훤은 아마 그 덕을 봤으리라). 옛 백제의 영토를 차지했으니 백제의 화려한 옛날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는 900년에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의자왕(義慈王)의 원한을 풀겠다”면서 후백제의 왕을 자칭한다. 그 소식에 자극을 받은 궁예는 그 이듬해에 송악(지금의 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을 수복하겠다”고 선언하며 고려 왕을 자칭한다(중국 측 사서에는 옛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은 탓으로 고구려는 고려라고도 불렸다)【후백제나 후고구려라는 국호에서 ‘후(後)’라는 수식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백제와 고구려였다. 아마 견훤과 궁예가 옛 왕조의 부활을 선언한 데는 중국 역사를 모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특히 분열시대에 탄생한 새 왕조들이 전통과 권위의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옛 왕조들(특히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나라들)의 국호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들을 오리지널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 前, 後, 東, 西, 南, 北 등의 글자들을 붙인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마침 한반도에 후삼국시대가 전개될 무렵 중국에서도 옛 왕조의 부활이 줄을 잇게 되는데, 예컨대 화북에서 연달아 정권교체를 했던 5대 왕조, 즉 양(梁) - 당(唐) - 진(晉) - 한(漢) - 주(周)는 역사에 후량 -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적어도 명칭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가 부활했다. 비록 300년 전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였으나 다시 찾아온 삼국시대, 이것을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졸지에 한반도의 단독정권에서 또 다시 삼국의 하나로 전락한 신라는 오리지널 삼국시대 때도 가장 약한 나라였지만 후삼국시대에서도 약소국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효공왕(孝恭王)은 비록 예상치 못한 왕위를 얻었고 예상치 못하게 오래 재위했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부활한 백제와 고구려에게 몹시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치세에는 동아시아의 커다란 격변이 일어난다. 907년 중국의 당나라가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일이지만 그래도 중국은 신라 왕실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인데, 이제 그 기둥이 내려앉았으니 신라의 사직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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