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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후삼국의 쟁패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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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3장 단일왕조 시대의 개막, 후삼국의 쟁패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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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쟁패

 

 

이 시점에서 앞에 말한 신라의 왕통이 갑자기 박씨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는 그 과정에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700여 년 만에 다시 박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태에는 혹시 궁예가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을 낳은 김씨 왕실에 대한 적대감, 후삼국을 통일해서 통일 왕조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 이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궁예는 신라의 왕위계승을 비트는 데 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상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서도 견훤의 명맥을 조이지 않은 것은 마침 그때 신라에 대한 공작으로 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박씨인 신덕왕의 재위 시절에 신라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을 뿐 태봉과는 전혀 마찰이 없었다. 바로 전 효공왕(孝恭王) 시절에 궁예의 군대가 신라의 북변을 공략한 것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이다. 여러 가지 사실에서 궁예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박씨 쿠데타를 지원하거나 조종했을 정황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신라의 새 왕실을 손에 넣은 그가 승리를 낙관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해가 있는 쪽으로 향하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바깥의 쿠데타를 조종하고 성공시킨 그는 정작 자신이 내부 쿠데타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918년 어느 날 밤 궁예의 측근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남몰래 왕건의 처소를 찾는다. 그들의 뜻은 궁예의 무도한 처사를 두고 볼 수 없으니 대의를 위해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궁예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왕건은 망설인다. 모험을 통해 일인자를 꿈꿀 것인가, 아니면 안전하지만 영원한 이인자를 택할 것인가? 때는 두 번 오지 않는다는 네 사람의 설득도 집요했지만, 왕건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하늘의 뜻이 당신에게 왔다면서 갑옷을 내미는 아내였다. 그날 밤으로 왕건은 궁성 앞에 나가 1만여 명의 군사를 얻었고,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궁예는 변장하고 달아났다가 얼마 후 백성들에게 맞아죽고 말았다.

 

결국 궁예는 통일로 가는 도로만 닦았을 뿐이고 정작 그 길을 신나게 달린 사람은 왕건이었다. 국호를 고려로,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꾼 것 이외에는 더 이상 고칠 게 없을 만큼 궁예가 닦아놓은 통일고속도로는 왕건에게 아주 유용했다. 궁예의 전략에서 왕건이 수정한 것은 다만 속도를 늦춘 것뿐이다. 고속도로를 앞에 두고서도 신중하기 그지없는 그는 궁예의 압박 전술을 버리고 신라, 후백제와 삼각구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 점에서 장기전에 실제로 대비한 것은 궁예라기보다 왕건이다.

 

 

미륵의 힘 아무리 신라의 불교가 호국불교라고 해도 승려의 신분으로 정식 정치인이 되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궁예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륵 신앙의 덕분이다(그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미륵은 곧 미래의 불교이므로 기존 불교의 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진은 금산사의 미륵불인데, 공교롭게도 금산사는 견훤의 근거지에 있었고 나중에 견훤이 유폐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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